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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탈권위의 국민청원

▲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청와대 국민청원 사이트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청와대의 국민청원 사이트는 1개월 동안 20만명 이상 추천을 받을 경우 행정부 장관 또는 청와대 수석 등 정부 관계자가 답변을 하도록 돼 있다. 국민소통공간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까지 `청소년 보호법 폐지`, `낙태죄 폐지`, `주취감경 폐지`, `조두순 출소반대`, `권역외상센터 지원 강화`, `전기용품 및 생활용품 안전관리법(전안법) 폐지` 청원 등 6개 청원에 답이 이뤄졌고, `가상화폐 규제 반대`, `나경원 의원 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원 파면`, `미성년자 성폭행 형량 강화`, `아파트 단지 내 횡단보도 교통사고처벌 강화`, `초중고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 등의 청원은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1호 청원이었던 청소년보호법 개정 또는 폐지 청원은 `부산 사하구 여중생 폭행 사건`을 계기로 생겨난 청원이었다. 청소년보호법의 본래 취지와는 다르게 청소년들이 자신이 미성년자인걸 악용,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성인보다 더 잔인무도한 행동을 일삼고 있다는 데 많은 국민들이 공감한 것이다. 2호 청원은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 및 도입을 요청하는 청원이었다. 임신이 여자 혼자서 되는 일이 아니므로 여성에게만 독박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였고, 불법 낙태수술로 인한 의료사고를 막기 위해 자연 유산 유도약(미프진) 도입을 요청하고 있다. 3호 청원인 주취감형 폐지와 4호 조두순 출소반대 청원은 잔혹한 성폭행사건인 `조두순 사건`에 대한 공분에 기인한 청원이었다. 조두순에 대한 주취감형이 부당하다는 주장에서 시작된 `주취감형` 폐지 청원은 일반적으로 술을 먹고 범행을 저지를 경우 심신미약(이성이 없고 우발적)이라는 이유로 감형을 받을 수 있는 법률조항에 따른 것이어서 폐지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답변과 함께 대법원 양형기준을 바꿔 향후 술에 취했다는 이유만으로 감형되지는 않게 됐다는 소식을 전했다.조두순 재심청원 역시 현행 법상 재심당사자의 이익을 위해서만 재심청구가 가능하다는 이유로 실현 불가능한 청원이란 청와대의 답변이 있었고, 법 개정 여부와는 관계없이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의 신변위협이나 조두순의 재범방지를 위한 규제 및 단속은 철저히 해나가겠다는 약속이 있었다. 5호 청원은 소말리아 피랍 사건, 그리고 북한군 판문점 귀순사건에서 활약한 이국종 교수가 우리 의료현장 현실을 고발하면서 떠오른 청원중증외상분야의 지원 방안마련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6호 청원인 전기·생활용품 안전관리법(이하 전안법) 폐지 청원은 지난 해 12월 시작된 청원으로, 소상공인·소비자 모두 죽는 법안이라며 전안법을 합리적으로 개정 또는 폐지해달라는 게 골자였다. 이 청원은 청와대와 국회의 법개정 노력으로 지난 연말 법 개정이 이뤄졌다는 청와대의 답변이 있었다. 최근에는 국정농단게이트와 연루돼 실형을 선고받았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판사에 대한 특별감사를 요구하는 청원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더구나 이 청원은 지난 5일 처음 발의, 8일 오전 7시 현재 해당 청원에 21만여 명이 참여해 불과 3일만에 공식 답변을 내놓는 기준인 `1달 내 20만명 참여`를 충족했다. 우리 사회에 재벌에 대한 비판과 공분이 어느 정도 번져 있는 지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청원 제기자는 “국민의 상식을 무시하고 정의와 국민을 무시하고 기업에 대해 읊조리며 부정한 판결을 하는 판사에 대해서 감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특히 이번 청원은 우리 사회가 나름의 권위를 인정해왔던 법원 판결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 사례로, 사회적 파문이 크다. 그동안 불합리한 법이나 관행에 대해 개선을 요청하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권위의 상징인 법원에 대해 정면불복하며 이의를 제기, `탈권위의 확대재생산`이 예상된다. 소탈한 화법과 태도로 `탈권위`를 주창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뿌린 씨앗이 그의 정신을 이어받은 문재인 대통령의 청와대에서 꽃피우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2018-02-09

대통령의 당부

▲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텔마 톰슨`이라는 여인은 2차 세계대전 중에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며, 한 육군 장교와 결혼을 했다. 남편을 따라 캘리포니아에 있는 `모제이브 사막` 근처의 육군훈련소에 배속돼 왔다. 남편 가까이에 있고자 이사를 했지만,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가득 찬 그곳에서의 삶은 참으로 외롭고 고독하기만 했다. 못마땅한 점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다. 남편이 훈련차 나가고 오두막집에 혼자남게 되면, 50도가 넘는 살인적인 무더위에 이야기 상대라고는 고작 멕시코인과 인디언뿐이었다. 영어로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항상 모래바람이 불어 음식물은 물론이고 호흡하는 공기에도 모래가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절로 신세 한탄이 나왔고, 슬프고 외롭고 억울한 생각이 들어 친정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이런 곳에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으니 당장이라도 짐을 꾸려 집으로 돌아가겠으며, 이곳에 더 눌러사느니 차라리 감옥에 가는 편이 낫겠다는 내용으로 자신의 형편을 호소했다. 그런데 당장 오라거나 자신을 위로해줄거라 기대했던 아버지의 답장은 이랬다. “두 사나이가 감옥에서 조그만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헤아리며 자신의 미래를 꿈꾸며 살았고, 다른 한 사람은 감옥에 굴러다니는 먼지와 바퀴벌레를 세며 불평과 원망으로 살았다.” 너무 간단한 편지 내용에 처음엔 너무나 실망했지만, 이 두 얘기가 그녀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이 문구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은 그녀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때부터 그녀는 현재의 상태에서, 무엇이든 좋은 점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자신에게 밤하늘의 별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주변을 살폈고, 원주민들과 친구가 되었다. 그들이 보여준 반응은 그녀를 놀라게 했다. 그녀가 그들의 편물이라든가 도자기에 대해 흥미를 보이면, 그들은 여행자에게는 팔지도 않던 소중한 것들을 이것저것 마구 선물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선인장, 난초, 여호수아 나무 등의 기묘한 모양을 연구했고, 사막의 식물들을 조사했으며, 사막의 낙조를 바라보기도 하고, 100만 년 전 사막이 바다의 밑바닥이었을 무렵에 존재했을 법한 조개 껍질을 찾아보기도 했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변화시켰을까. `모제이브 사막`은 변함이 없고 인디언도 달라진 것이 없다. 변한 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그녀의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이다. 그녀는 `비참한 경험`을 생애에서 가장 `즐거운 모험`으로 바꾸었고, 새롭게 `발견한 세계`에 자극 받고,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그것을 소재로 해서 `빛나는 성벽`이라는 소설을 썼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오후 청와대에서 정부 부처 장·차관 워크숍을 주재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모든 부처 장·차관급 인사가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날 워크숍에 참석한 인원은 150여 명으로, 이낙연 국무총리를 비롯해 장관급 인사 24명이 참석했다. 다만, 외국 출장 중인 송영무 국방부 장관과 직무상 독립성이 요구되는 최재형 감사원장, 박준성 중앙노동위원장, 이성호 국가인권위원장, 김창준 세월호 선체조사위원장 등은 참석하지 않았다. 또 처장·차관·청장 등 차관급 인사 56명이 참석했고, 청와대에서는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 장하성 정책실장, 정의용 안보실장 등 3실장을 비롯한 참모진이 참석했다.문 대통령은 비공개회의에 앞서 인사말을 통해 정책의 우선순위를 국민의 삶을 지키는 것을 정부의 최우선 역할로 삼도록 바로잡고, 모든 정책은 수요자인 국민의 관점에서 추진토록 하고, 정부혁신도 국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또 공정하고 깨끗한 사회 만들기에 정부가 앞장서고, 진심을 다해 국민과 소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마지막으로 장·차관 여러분이 다함께 바라봐야 할 대상은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마음가짐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평범한 주부가 소설가로 삶이 바뀌는 기적도 일어난다. 문재인 정부의 마음가짐이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가 되어주길 기대한다.

2018-02-02

우리 정치에 거는 희망

▲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술자리에서 토론거리로 내놓아선 안 된다는 주제 몇 가지가 있다. 정치, 종교, 사랑이야기다. 종교는 개인적 범주에 들어가는 신념이자 신앙의 문제이니 다른 사람과의 토론에서 승부낼 건덕지가 없다. 사랑 이야기는 백인백색이고, 이성아닌 감성의 세계에서 이뤄지는 얘기이니 입을 대봤자 터럭 만큼도 달라질 일이 없으니 역시 패스다. 그나마 서로 상대를 설득할 여지가 있다고 여겨지는 정치 얘기도 우리나라에서는 만만치 않다. 서로의 생각이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고, 틀리다고 목청 높이는 상황이니 아무리 토론해봐야 말 싸움밖에 안된다. 그러니 스트레스 풀자고 시작한 술자리에서 언급하지 말자는 자포자기 선언일게다. 그렇다해도 다른 주제는 차치하고, 우리 사회를 이끌고 가는 정치에 대한 희망을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어두운 감옥에 갇힌 무기수가 있었다. 절망의 나날이었지만 그는 한 줄기 빛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는 교도소장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교도소 마당 구석에 채소밭을 일구게 해 주십시오.” 첫 해에는 양파와 같은 채소를 심고 다음 해에는 작은 묘목을 심고 장미 씨도 뿌렸다. 한 해 두 해 지날 때마다 보람과 기쁨을 느끼며 정성스럽게 밭을 일구었다. 새싹이 돋고 꽃을 피우는 식물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바깥에서 했던 것처럼 매일 꾸준하게 운동을 했고, 다른 죄수들이 운동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행동은 교도소의 열악한 환경까지 개선하게 만들었다. 교도소 내에서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졌고, 27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가 가석방으로 풀려나가자 많은 사람이 기뻐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첫 흑인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의 이야기다. 만델라는 타고난 희망주의자였다. 종신형을 선고받자 사형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그는 정치범으로 독방에 갇혀 있을 때 어머니를 잃고, 큰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가족들이 강제로 흑인 거주 지역으로 옮겨지고, 둘째 딸은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감옥에 있은 지 14년째 되던 해, 그는 딸에게서 손녀의 이름을 지어달라는 편지를 받았다. 며칠 뒤 면회 온 딸에게 만델라는 작은 쪽지를 내밀었다. 그 쪽지에 적힌 손녀 이름을 보고 딸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손녀의 이름은 `희망(아즈위·Azwie)`이었다. 사방이 벽으로 막힌 감옥에서도 희망의 꽃이 피었다. 만델라는 교도소 안에서도 장미를 키우듯 자신의 희망에 물을 주었다. 그 희망은 나중에 국민의 희망으로 자랐고 인류의 희망이 되었다. 설혹 삶이 감옥처럼 느껴질지라도 포기해선 안 된다. 희망의 싹이 트지 않거나 잎이 시들고 있다면 더 부지런히 물을 줘야한다.이탈리아의 시인 단테는 자신의 작품에서 지옥의 입구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고 적었다.“여기 들어오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희망을 버리는 순간 이 세상은 지옥이 된다.우리 정치가 지옥길로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이제는 희망을 얘기했으면 좋겠다. 사드 문제 하나로 썰렁해진 미국·중국과의 관계가 힘겹고, 위안부 합의 파기로 불퉁해진 일본을 애써 달래야 하는 외교도 힘겨운 마당에 경제 여건 역시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그나마 끝없는 대결 국면이던 남북관계가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대화 국면에 접어들었으니 잘 보듬어 핵 위협없는 한반도가 되길 소망한다. 이처럼 어려운 국내·외 상황에서 우리 정치가 정치보복 논란에 휩싸이고 있어 걱정스럽다. 전 정권의 치부가 드러났다면 적절한 처벌은 당연하다. 그러나 정치보복으로 흘러선 안 된다. 이유야 어떻든 국민의 눈에 정치보복으로 비쳐진다면 문재인 대통령 역시 다음 정권에서는 또 다른 적폐로서 청산대상에 오를 수 밖에 없다. 태공은 `남을 해치는 말은 도리어 자신을 해치게 되니, 피를 머금었다가 남에게 뿜으면 먼저 자신의 입부터 더러워진다`고 했다. 사람들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교훈을 너무 쉽게 잊는다.

2018-01-26

오락가락 정책의 허와 실

▲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야당인 자유한국당이 문재인 정부의 정책이 오락가락 한다고 비판공세를 펼치고 있다. 17일 국회 원내대책회의에서 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는 “이 정권에는 유독 확정되지 않은 정책 많다”면서 “설익은 정책을 남발하다보니 부처 간에도 엇박자가 나고 부작용이 생기면서 아니면 말고 하는 무책임이 난무하고 있다”고 포문을 열었다. 그러면서 그는 가상화폐 거래소 폐지에 대해서는 아직 살아있는 옵션이라 하고, 유치원 영어교육 금지는 전면 재검토 한다고 하더니 어제는 군복무기간 마저 단축한다고 했다가 아직 확정된 것이 없다고 발표했다며 정부여당이 오락가락 갈팡질팡 결정 장애를 겪는 장애를 앓는 것 아니냐고 야유했다. 한국당의 정책통인 함진규 정책위의장 역시 문재인 정부의 정책과 관련, “전(前) 정부의 불통을 비판하면서 그토록 소통을 강조하는 문재인정부가 제대로 된 국민 의견수렴 과정 없이 즉흥적으로 정책을 불쑥불쑥 발표했다가, 문제가 불거지고 거센 여론의 반발에 부딪히자 서둘러서 백기투항하거나 미봉책으로 슬그머니 덮는데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정책 신뢰도는 급격하게 추락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홍문표 사무총장은 사드나 원전사례를 들면서 “대통령이 분명히 실패한, 잘못된 정책을 우리 국민과 한국당이 뒤집어놓아서 바로 잡은 것”이라고 자평한 뒤 “원전과 사드는 다시 부활이 됐는 데, 왜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잘못된 것을 사과하지 않느냐”고 일갈했다.한국당의 주장대로 최근 정부여당 정책 가운데 재검토하게 되거나 연기, 또는 폐기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청와대 국민청원에서 30일동안 20만명 이상 추천을 받아 정부 또는 청와대 관계자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가상화폐 거래소 폐지문제를 비롯해 유치원 영어교육 금지, 아동수당 지급문제, 군복무기간 단축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해묵은 주제로는 사드나 탈원전문제도 마찬가지다. 한국당의 지적이 옳다. 필자도 여당과 정부가 `설익은 정책을 생각나는대로 내놓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국가정책이란 것이 부작용이나 반작용을 생각 않고 즉흥적으로 내놨다가 반발이 나오면 다시 뒤집는 식으로 이랬다저랬다 한다면 큰 문제다. `준비된 정권`이면 해선 안될 행태다.그러나 또 한편으로 지금 정치권에서 논란이 되는 정책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도 있다. 논란이 된 정책들은 대개 야당이나 국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재검토하게 됐거나 연기, 또는 폐기한 정책들이다. 따라서 이런 비판이 성립하게 된 것도 정부가 자신의 정책을 고집하지 않고 태도를 바꾸었기 때문이란 점을 감안해야 한다.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정부여당이 정책을 내놓고도 야당이나 국민의 반박이나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정책을 좀 더 보완하거나 시간을 두고 추진하겠다고 판단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예전 정부와 비교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특히 박근혜 정부는 이른 바 `불통 정부`라는 비판을 들을만큼 야당과 국민들이 뭐라하든 싸그리 무시하는 자세로 악명이 높았다. 그러니 그 끝도 좋지못했다. 옛말에 `십 년가는 권세 없고 열흘 붉은 꽃 없다`(權不十年 花無十日紅)고 했다. 이 정부는 `쇼통`이란 비판을 받으면서도 국민여론을 귀담아 듣는 노력을 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은 평가해줄만 한 것 아닌가 싶다.어제의 여당이었던 한국당도 정부·여당이 하는 일을 무작정 깎아내리려고만 해선 안 된다. 오락가락하게 된 원인의 일정 부분은 야당의 비판에 여당이 귀 기울여 벌어진 일들이 아닌가. 앞으로는 야당도 여당이 잘한 것은 잘했다 평가해주고,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논리로써 끝까지 관철시키려는 자세가 팔요하다. 여당도 향후 어떤 정책을 발표할 때는 특히,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충실히 들어 보완한 뒤 발표하는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 그게 민주주의의 요체인 민주적 절차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지름길이다.

2018-01-19

불통보다 좋은 `쇼통`

▲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 방식이 신년 벽두부터 정치권과 언론계에서 화제로 떠올랐다. 청와대가 지난 10일 개최한 신년 기자회견은 장소 선정부터 예전 정부와 달랐다. 청와대는 지난해 8월 문 대통령 취임후 처음으로 기자회견을 연 뒤 두 번째 기자회견도 청와대 영빈관 2층에서 열었다. 청와대 영빈관은 주로 외국의 대통령이나 총리가 방문했을 때 한국을 알리는 민속공연과 만찬 등이 열리는 공식 행사장으로 쓰여왔다. 이전 정부들이 주로 청와대 춘추관에서 신년 기자회견을 가졌던 것을 생각하면 이날 하루 기자들을 손님으로 대접한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또 청와대 공식행사에 공식 풀 기자단이 아니라 청와대 상시 등록기자들 모두에게 참석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청와대 출입기자단 채팅방에는 11일 현재 298명이 속해 있다. 이 가운데 윤영찬 국민소통수석과 박수현 대변인, 권혁기 춘추관장 등 청와대 직원을 제외하면 청와대 출입기자는 280여 명인데, 이날 250여 명이 참석했으니 거의 대부분 기자가 참석한 셈이다.회견장 앞 복도에 간단한 다과와 차를 마실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나 행사 시작 전 미리 행사장에 입장해 대기중인 기자단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대중가요가 흘러나온 것도 예전 청와대와는 달랐다.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기자회견에 어울린다는 뜻에서 김동률의 `출발`과 가야만 하는 길을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가자는 뜻에서 윤도현의 `길`, 그리고 제이레빗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모두가 함께 가야 할 `그곳`에 대한 기대와 바람이 담겨 있다고 청와대는 설명했다. 참석자들의 마음을 넉넉하게 만드는 하나의 설정이 됐다.압권은 예전과 확연히 다른 기자회견 방식이었다. 문 대통령은 사전에 질문과 질문자를 정하지 않았고, 회견장에서 직접 질문자를 선택했다. 기자들은 자유롭게 질문했고, 대통령은 거기에 답했다. 예전 청와대는 대통령 기자회견때 미리 질문내용과 질문할 기자를 정한 뒤 순서에 따라 진행했다. 자유질문이나 돌출발언은 허용되지 않았다.청와대의 새로운 신년기자회견 방식이 미국 백악관방식을 본뜬 것이란 보도가 있었지만 정작 외신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 내막은 이렇다. 현재 백악관에는 750여 명의 출입기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백악관 기자실에 앉을 수 있는 기자들의 좌석은 49석뿐이다. 더구나 자리에 언론사 이름이 붙어 있어 아무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맨 앞줄은 AP통신·ABC·NBC·CBS·CNN·폭스뉴스, 두 번째 줄은 워싱턴포스트(WP)·뉴욕타임스(NYT)·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의 차지다. 독자가 많고, 시청자가 많은 언론일수록 취재가 더 용이하도록 도와주는 언론 문화가 반영돼 있다. 백악관 참모진과 질의응답에도 이같은 경향이 반영된다. 상대적으로 독자와 시청자가 많아 매체력이 큰 언론사가 더 많은 기회를 얻는다. 그래선지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해 질문할 기회를 잡았던 워싱턴포스트 안나 파이필드 도쿄 지국장은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기자회견 후기를 통해 “사전에 질문을 정해놓는 미국 백악관과도 다른 것 같다”고 털어놨다. 파이필드 기자는 이어 “기자회견은 모든 기자에게 열려있다. 환영할 만한 발전”이라고 평가했다. 파이필드 기자는 지난 2016년 박근혜 정부 시절 아예 신년 기자회견에서 제외됐다며 청와대 공식 트위터 계정에 항의성 질문을 던진 적도 있었다.야당인 자유한국당은 청와대의 이런 행사기획에 대해 `쇼통`이라고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언론들은 `쇼든 뭐든 국민과 소통을 하려는 청와대의 노력은 평가해줄만 하다`는 반응이었다. 불통으로 비판받았던 청와대는 언론의 호평에 흐뭇한 표정이다.“소통과 쇼통이 얼마나 다른지 모르겠다. 어쨌든 불통보다는 쇼통이 좋지 않나요?” 정치권의 한 관계자가 던지는 반문에 야당이 뭐라 답할 지 궁금하다.

2018-01-12

권력의 핵단추

▲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북한의 김정은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벌인 `핵단추` 설전이 화제다. 소란의 진상은 이렇다.북한 김정은이 신년사를 통해 평창올림픽 대표단 파견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미국을 겨냥해 “핵 단추가 내 사무실 책상 위에 항상 놓여 있다”고 위협하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를 맞받아 “지금 로켓맨이 처음으로 남한과 이야기하기를 원하고 있는데 아마 좋은 뉴스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며 “김정은이 책상 위에 핵 버튼이 있다고 했는데 누군가가 나도 핵 버튼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김정은에게)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발끈했다. 한발 더 나아가 그는 “내 핵 버튼은 훨씬 크고 더 강력하며 작동도 잘 한다”며 김정은의 `핵 단추` 발언을 폄하했다. 사실 핵보유국이자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대통령에게 핵단추, 아니 핵가방이 있다는 사실은 비밀아닌 비밀이다.재미있는 것은 뉴욕타임스(NYT) 등 미 언론들이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맞대응하면서 언급한 것과 같은, 물리적인 핵단추는 “없다”고 보도했다는 사실이다. 그 대신 미국의 핵공격 절차는 단추형식이 아닌 `풋볼`이라고 불리는 서류가방 형태로 돼 있다고 밝혔다. 이 가방은 지정된 미군 장교 5명이 서로 돌아가면서 항상 대통령 지척에서 들고 다니는데, 핵발사 장치뿐만 아니라 라디오 전파를 이용한 통신장비, 전쟁계획을 담은 가이드북 한 권을 담고 있다고 했다. 북한의 핵단추는 확실히 알 수 없는 반면 트럼프의 핵단추는 `핵단추가 아닌 핵가방`으로 실존한다고 강조하는 반어법인 셈이다.김정은과 트럼프가 서로 핵단추를 과시하지만 실제로 사용하기는 어렵다는 데 이설이 없다. 핵폭탄을 보유한 나라끼리 전쟁이 터질 경우 공멸할 수 밖에 없는 재앙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코 눌러선 안될 핵단추를 굳이 언급하는 건 상대를 압박해 이익을 챙기기 위한 것이라 보면 된다. `칼이란 것은 뽑기 전이 두려운 법`이라 했다. 일단 빼면 끝이다. 상대방도 이판사판, 죽기살기가 되기 때문이다. 핵단추는 누구에게나 최악의 선택이 될 수 있는 칼 이상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정치권에서는 언제부턴가 `권력의 핵단추`가 남용되고 있다. 자유한국당 최경환 의원이 4일 국정원 특활비를 받았다는 혐의로 구속됐고, 박근혜 전 대통령도 30여 억원의 특수활동비를 전용한 혐의로 추가기소된다는 소식이다. 최 의원은 친박계 핵심실세로 이명박 정부때 산자부 장관을, 박근혜 정부에서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냈는데, 문재인 정부 들어 첫 현역의원 구속이란 불명예를 안았다. 시범 케이스란 얘기다.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결정 이후 지역구 활동에만 전념하며 몸을 낮춰왔지만 끝내 검찰의 구속을 피하지 못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로 탄핵된 후 검찰의 기소로 수감중인 박 전 대통령이야 특활비 혐의가 덧씌워진다 해서 또 하나의 혐의가 추가됐을 뿐 별다를 게 없다.자유한국당은 논평을 삼간 채 일부 의원들이 “검찰도 정치보복에 의한 수사가 이뤄졌다는 의혹에 대한 멍에를 계속 안고 가야 할 것”이라며 항변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뿐 아니라 이명박, 노무현 정부 등에서도 검찰이나 국회 정보위원회 등에 관행으로 전해졌던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빌미로 현역 의원을 구속한 것은 추후 정치권에서 정치보복이란 반발이 제기될 수 있다.언론에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자며 목청을 높이곤 한다. 하지만 권력의 속성은 쉬이 바뀌지 않는다.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는다.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대선에서 이긴 것만으론 성에 안찬 듯하다. 꼭 전임 대통령과 그 측근들을 해코지해야 직성이 풀린다.권력이란 이름의 핵단추를 눌러보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뿌리치기 힘든 마성으로 다가가는 모양이다.

2018-01-05

조마조마한 `문재인 외교`

▲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지난 2015년 박근혜 정부가 강행했던`한일 위안부 합의`의 불편한 진실이 폭로됐다. `한일 위안부합의 검토 태스크포스(TF)`는 최근 양국 간 합의의 총체적 문제점을 적시한 보고서를 통해 한일간 비공개 이면합의가 있었을 뿐 아니라, 피해자와의 소통도 부족했다고 결론지었다. 국민들은 일본이 위안부 합의 이후 소녀상 이전을 마치 한국이 합의한 것처럼 강하게 거론하고,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을 강조하며 `적반하장격` 태도를 보인 이유를 이번에야 알게됐다. 보고서는 이면 합의와 관련해“일본 쪽 희망에 따라 이병기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과 야치 쇼타로 일본 국가안보국장 협의에서 결정됐다”고 설명했다. 더구나 TF 검토에서 확인된 비공개 내용을 보면 양측에서 문제가 되거나 민감한 사항과 관련해서 한국 측이 일본의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박근혜 정부가 왜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입장을 제대로 수렴하지 않은 채 성급하게 비공개 이면합의 투성이의 `한일위안부 합의`를 맺었는 지는 알 수 없다.참으로 유감스런 외교참사다. 테스크포스 보고서 내용만 보면 합의 파기나 재협상을 추진하자는 목소리에 힘이 실릴 가능성이 크다. 문재인 대통령도 대선후보 시절 재협상 추진을 공약했고,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취임 전부터 사안의 본질이 인권 침해임을 강조하며 `피해자 중심주의`를 줄곧 강조해왔기에 더욱 그렇다.문 대통령은 28일 전날 있었던 `한일 위안부합의 검토 태스크포스(TF)` 발표에 대해 “2015년 한·일 양국 정부간 위안부 협상은 절차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중대한 흠결이 있었음이 확인됐다”면서 “지난 합의가 양국 정상의 추인을 거친 정부간의 공식적 약속이라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저는 대통령으로서 국민과 함께 이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고 선언했다. 그 이유로 문 대통령은 역사문제 해결에 있어 확립된 국제사회의 보편적 원칙에 위배될 뿐 아니라, 무엇보다 피해 당사자와 국민이 배제된 정치적 합의였다는 점, 그리고 현실로 확인된 비공개 합의의 존재가 국민들에게 큰 실망을 주었다는 점 등을 들었다. 그러면서 문 대통령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이며, 진실을 외면한 자리에서 길을 낼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일본은 `목에 가시 걸린 듯` 입에 담기도 껄끄럽고 불편했던 `위안부 문제`를 이미 합의한 이상 두번 다시 협상테이블에 올리려 하지 않는다. 일본정부의 입장은 `재협상 절대 불가`다.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무상은 담화문에서 “위안부 합의는 외교 당국 국장급 협의를 포함해 모든 레벨에서 노력한 뒤 양국 외교장관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이라고 합의하고, 양국 정상도 전화 회담에서 같은 내용을 확인했다”며 “한국이 합의를 착실히 이행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가 합의를 변경하려 한다면 한·일 관계는 `관리 불능`상태가 된다”고 목청을 높였다. 일본의 향후 대응과 관련해서는 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대 명예교수의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그는 “한국은 유교 문화라 `약속 자체가 옳았는가`를 중요하게 따지지만 일본은 사무라이 문화라 `약속이 옳건 그르건 지켰느냐`를 중요하게 여긴다”며 “만약 합의가 깨지면 일본의 반발은 한국이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할 수 있다”고 했다. 매우 심각한 외교마찰이 우려되는 대목이다.어떻든 위안부 합의에 대한 문 대통령의 입장은 선명하고 또렷하다. 그래서 속이 시원하다. 하지만 외교란 게 어떻게 칼로 무자르듯 할 수 있나. 국익을 위해 어떻게든 좋은 말로 포장해서 나라의 입장을 대변하고, 국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추진해야할 것 아닌가. 사드 미사일 도입과 관련, 중국과 사전 조율이나 양해없이 덜컥 발표했다가 중국의 심각한 반발을 샀던 전례가 또다시 되풀이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중국을 달래려다 미국과 소원해진 현 정부가 이제 일본과도 외교마찰을 빚을 판이니 그저 조마조마하기만 하다.

2017-12-29

뉴욕 탐방기

▲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미국 뉴욕을 다녀온 건 지난 달 27일부터 4일까지 7박 8일이었다. 1천600만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는 거대도시 뉴욕을 방문한 것은 지난해 2월에 이어 이번이 두번째다. 뉴욕 맨해튼에서 공부하는 큰 딸의 카네기홀 바이올린 독주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때늦은 탐방기를 쓰게 된 것은 맹방 미국과 멀어지는 걸 마다않는 청와대를 걱정하다 불현듯 미국을 방문한 소감 한 줄 써보자는 심산에서다.미국 최대의 도시인 뉴욕은 미국의 상업·금융·무역의 중심지이자 많은 대학·연구소·박물관·극장·영화관 등 미국 문화의 중심지다. 국제적으로는 대서양 항로의 서단에 위치하는 가장 중요한 항구이며, 세계 금융의 중심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46년 국제연합(UN) 본부가 설치돼 국제정치의 각축장으로도 떠올랐다. 우선 뉴욕의 교통은 서울보다 열악했다. 뉴욕의 택시는 한국과 비슷한 2.5달러지만 거리당 요금이 2배 이상이어서 비싸다. 특히 뉴욕 도심의 교통체증은 서울 도심이상이다. 또 도심 주차료가 엄청나게 비싸다. 맨해튼 도심 건물에 한달 주차를 하려면 약 100만원 이상 든다고 한다. 그래서 뉴욕시민들은 도시 전역을 거미줄처럼 꼼꼼하게 연결하는 뉴욕 지하철을 이용한다.뉴욕의 빈부격차는 확연하다. 100층을 넘는 초고층 건물이 빼곡히 들어선 월가와 맨해튼 도심을 활보하는 샐러리맨의 자부심 가득한 표정에서부터 100년을 훨씬 넘어 폐허처럼 쇄락한 4~5층 건물들이 들어선 할렘가 흑인 노동자들의 피곤에 찌들은 얼굴을 함께 볼 수 있다. 도심 지하철역 구내에서 쓰러져 자고 있는 걸인들의 모습은 서울과도 다르지 않다. 5번가 대로변에 줄지어 선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취급 상가의 화려한 뒷골목에는 서민형 할인매장들이 뒤를 받치고 있었다.그래도 문화도시 뉴욕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고, 매력적이었다. 도시 곳곳에서 마주치는 버스킹은 때론 흥겹고, 때론 진지했다. 고가도로 다리 밑이나 센터럴파크 앞이나 타임스퀘어 광장은 말할 것도 없고, 지하철 역 구내에서 기타를 들고 팝송과 랩, 재즈곡을 부르는 풍경을 마주쳤다. 듣는 듯 지나는 듯 해도 적지않은 시민들은 1달러 지폐를 흔쾌히 내놨다. 센트럴파크 앞 광장에서 전통악기인 징과 비슷한 악기를 두드리며 연주하는 금발의 백인 연주자와 박물관 앞 광장에서 백파이프를 연주하는 흑인남성의 버스킹도 눈길을 끌었다. 또 하나 100년이 넘은 지하철 역 난간과 기둥, 가드레일위에 뿌리박은 난장이와 동물들의 앙징맞은 청동 조형물들은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매력으로 다가왔다.뉴욕에서 가장 큰 볼거리는 인류문화의 원류를 보여주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현대미술의 정수를 소개하는 모마(MOMA)미술관이다. 인류문화유산에 대한 미국민들의 사랑과 관심을 엿볼수 있었다. 세계 3대박물관으로 꼽히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입장료는 기부금 1달러면 족했다. 1880년 센트럴 파크 현재 위치에 개관한 박물관 수집품은 이집트, 그리스, 중세 미술과 유럽·미국·기타 극동 및 고대 중 ·근동 미술, 그리고 조각·공예 ·판화·무기류·코스튬·가구 등 선사시대 이래의 인류역사의 산물인 세계 각국의 유물 총 200만 점이 전시되고 있다.미술품으로만 따지면 일명 `모마(MoMA)`라 불리는 뉴욕 현대 미술관이 압권이다.1929년 설립된 모마에는 188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작품 15만 점이 전시되고 있다. 6층 규모의 미술관에는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잭슨 폴락 등의 현대 미술 작품과 고흐, 고갱, 세잔, 마네, 모네, 클림트, 샤갈, 마티스, 피카소 등 근대 미술 작품이 전시돼 눈을 호강하게 만든다. 금융도시, 정치도시, 그리고 문화도시 뉴욕, 그 뒤안길은 인류역사가 채택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맞부딪는 역사의 현장으로 남아있었다.

2017-12-22

블라인드(Blind) 채용

▲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청와대가 최근 블라인드 채용으로 5개 분야 전문임기제 공무원 6명을 뽑았다. 블라인드 채용은 학력, 출신지, 나이, 결혼여부, 가족관계를 보지 않는 채용방식이다. 그 결과 평균 경쟁률은 44대1이었으며, 합격자 6명 모두 여성이 선발됐다. 합격자들의 출신 대학을 분석한 결과, 연세대 출신이 2명, 숙명여대, 덕성여대, 서울예대, 경일대 출신이 각각 1명씩이었다. 지원자 연령대도 20~40대로 폭이 넓었다. 채용 심사위원들은 지원자들의 경력, 전문성, 직무계획서만으로 심사를 진행했다. 실기 전형은 일자리통계 전문가의 경우 통계분석 및 서술형 지필시험, 통번역 전문가는 영한 순차통역 및 번역, 문화해설사는 해설 시연, 동영상 전문가와 포토에디터 직군은 동영상 및 사진 대표작 포트폴리오 심사를 거쳤다. 청와대 이정도 총무비서관은 “개인적으로 공직생활 25년을 하면서 이번 채용 결과에 놀란 부분이 많다. 공직사회에는 특정 대학을 나온 남성들이 많은데 블라인드 채용을 해보니 그 관행이 모두 깨졌다”면서 “배경이 다양한 우수 인력들이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인사시스템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최근 중앙당 사무직 당직자 6명을 블라인드 채용제로 뽑은 더불어민주당의 채용후기도 화제를 모았다. 민주당에 따르면 140대 1 이상의 높은 경쟁률을 기록한 이번 채용에서 수도권에서는 서강대 출신 2명, 중앙대 출신 1명, 성균관대 출신 1명이 각각 선발됐고, 지역에서는 전남대 출신 1명과 영남대 출신 1명이 나란히 선발됐다. 특기할 만한 것은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소위 `SKY` 출신 합격자가 없었고, 해외 유명 대학 출신도 모두 낙방했다는 사실이다.이처럼 공기업·공공기관에 블라인드 채용이 본격 도입되면서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 `명문대생` 취업준비생들의 고심도 깊다. 이들은 출신 학교를 드러내기 위한 `쇼잉(showing)` 전술, 이른바 `블라인드 파훼법`을 집단 지성처럼 공유한다.예를 들어 출신 대학이 드러나는 이메일 주소나 동아리명을 적는 방법, 대학 고유의 학과명·수업명 등을 언급하는 방법이 대표적이다. 이메일 주소 기재란에 학교 구성원만 사용할 수 있는 `snu.ac.kr(서울대)``yonsei.ac.kr(연세대)``korea.ac.kr(고려대)` 등 이메일 계정을 적거나 `언더우드(연세대)``미래자동차(한양대)``유학·동양학과(성균관대)`등 특정 대학에서만 쓰는 학과·수업명을 언급하는 방식이다.블라인드 채용제 도입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뜨겁다. 찬성측에서는 먼저 균등한 기회제공의 논리를 앞세운다. 문화와 교육,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수도권 집중화를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이므로 서울공화국에서 지방균형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얘기다. 지방대를 나왔다는 이유로 서류전형조차 통과하지 못했던 취업준비생들에게는 희소식중의 희소식이다. 또 탈스펙으로 학연, 지연, 혈연 등 개인 인적사항으로 차별받는 일이 없게 됐다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묻지마 지원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다. 직무관련 지식과 경험을 묻는 질문이 늘면서 허수 지원자가 줄어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가 크다.반대측 논리도 분명하다. 우선 역차별 논란이다. 학력이란 과거 노력의 결과물인데, 이를 제외하고 평가하는 것은 지금까지 쏟아부은 노력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는 항변이 대표적이다. 불확실한 평가기준도 문제다. 면접을 위한 준비로는 외모와 말빨, 필기시험을 위한 준비인데, 이런 것들을 준비하는 비용도 취업준비생에게나 기업에게 만만치 않다. 또 인사청탁과 비리에 취약한 점도 단점이다. 인사비리가 의심돼도 `회사에 맞는 인재`라고 답변하면 문제 삼을 수 없다.`새 술은 새 부대에`란 말이 있다. 변화의 새 바람을 위해선 새 제도를 도입하는 데 한 표 던지고 싶다.

2017-12-15

마음을 움직이는 편지

▲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구식이라 해도 좋다. 손으로 한자 한자 정성들여 쓴 손편지가 더 많은 감동을 준다고 믿는다. 손편지에는 편지 쓴 이의 마음과 정성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지난 주 청와대에 세월호 희생자인 단원고 조은화 양과 허다윤 양의 부모님들이 찾아왔다. 부모님들은 오랜 기다림 끝에 10월에 생일을 맞는 딸들의 생일 전에 장례를 치러주기로 했다. 그래서 다른 가족들과 협의 끝에 지난 9월 23일부터 25일까지 3일 동안 서울시청에서`이별식`을 했다. 이제는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님들이 지난 11월 30일 청와대를 찾아 직접 쓴 손편지를 문재인 대통령께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세월호 선체에서 뒤늦게 발견된 유골의 보고 누락 문제에 대해 입장을 전했다.두 어머니는 편지에서 “이별식으로 은화, 다윤이를 보낸 엄마들이 이별식 후에 (유골이) 나오면 언론에 내보내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 10월에 나온 (유골이) 은화, 다윤이로 밝혀진 것도 언론에 내보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찾은 가족에게는 다행이지만 아직 못 찾은 가족에겐 고통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두 어머니는 “아직 못 찾은 가족을 배려하는 마음, 찾은 가족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 유골은폐, 적폐로 낙인 찍힌다면…. 은화, 다윤이 엄마는 평생 현장 책임자 가족에게 마음의 짐을 지고 살것 같다”고 했다. 이어 “아픔 속에 장례를 치르는 가족, 찾았지만 다 못 찾고 찾은 것이 있다 해도 못 찾은 가족을 생각해서 내려가지도 못 하는 가족을 배려한 것 밖에 없다”며 “내 가족이 소중하면 다른 가족들도 소중함을 알고 함께 하는 것이 세월호가 주는 교훈이라 생각된다”고도 했다. 이 글이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라오자 `유골발견 은폐` 행위에 분개했다는 상당수 네티즌은 “두 어머니의 말씀에 진심과 진실이 다 있네요.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한 분들의 명예와 지위는 지켜져야할 것입니다. 어떤 대한민국 국민도 억울하거나 누명으로 힘든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라는 반응이 잇따랐다. 세상의 진실은 이렇듯 겉보기와는 다른 곳에 있다.지난 달 포항 한동대학교 학생들은 지진으로 놀란 포항 지역 수험생들에게 따뜻한 응원의 메시지를 담은 손편지를 전했다.한동대의 한 학생은 “수능을 앞둔 포항친구들에게. 지진으로 인해 많이 불안할 텐데, 그 와중에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저희가 더 큰 감동을 받고 있다…. 우리가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응원할게요. 사랑합니다. 같이 이겨나가요”라고 위로했다. 후배를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이 넘쳐나는 사연이었다.임금피크제에 대해 아쉬운 심경을 토로하는 어느 언론인의 편지글도 화제다. 편지글 내용은 “아들아, 내 편지를 보아라. 나도 은퇴가 코앞이다”라고 시작한다. 그런 뒤 그는 “어느 날 도입된 임금피크제란 말이 뜯어보니 내 얘기더라. 대통령이 말하는 4대 개혁의 본질은 `세대 전쟁`에 있다고들 했다. 불현듯 그게 너와 나 사이 전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찔했다”고 토로한 뒤 “노동 개혁의 첫머리에 `취업 규칙 변경`이란 게 정년을 3년 앞둔 경우 내년에 봉급을 10~30% 깎고, 그 이듬해 다시 그쯤 깎아 퇴직 마지막 해엔 지금 봉급의 절반만 받으며 1년을 버텨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라고 까발렸다.그의 반론은 신랄했다. “내가 네 나이일 때 나는 주어진 대로 살았다. 이층 양옥의 북쪽 모퉁이 방에 철제 계단 타고 올라가는 전세를 살았고, 그도 안 되면 헛간 같은 지하 단칸에 신혼을 꾸렸다. 직장도 실력이 있으면 사법시험도 붙고 은행도 들어갔지만 그게 안 되면 벽돌도 나르고 리어카도 끌었다”고 했다.그러면서 그는 “어느 소설가가 말한 것처럼 너희의 젊음이 상(賞)으로 받은 것이 아니듯 우리가 늙어가는 게 벌(罰)이 아니다”라고 외쳤다.편지글을 통해 전해지는 진실의 울림은 늘 사람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2017-12-08

대통령의 변심(變心)

▲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연말 예산철에 접어들면서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국정에 그대로 반영하려는 여당과 이에 반대하는 야당의 몸싸움이 치열하다. 실제로 2018년도 예산안 처리를 위해 여야가 투트랙 협상에 나선 가운데, 공무원 증원과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지원 예산이 최대 난관이 되고 있다.공무원 증원과 최저임금 인상이 최대 쟁점이 되면서 이에 대한 합의가 전제되지 않을 경우 기한내 예산안 처리가 불투명하다는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현재 집권여당인 민주당은 공무원 증원과 최저임금 인상에 대해 원안을 고수하고 있다.야당 역시 공무원 증원에 대해서는 반대가 강경하다. 정우택 한국당 원내대표는 “최저임금과 공무원 문제가 목에 걸리는 `보틀넥`(병목현상)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은 정부여당이 끝까지 원안을 고집할 경우 정부 예산안을 부결시킬 수 있다며, 정책연대협의체를 통해 대안을 제시하며 여당을 압박하고 있다.옛말에 `둥근 구멍에 네모난 막대는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살다보면 목표에 상황을 억지로 끼어맞추기 위해 노력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인생에서 발걸음 하나하나 낭비해서는 안 된다. 언제나 자신이, 가고자 하는 최선의 길로 가고 있는 지 냉철하게 질문하고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런 차원에서 문 대통령이 마음을 바꿔먹어, 변심(變心)함으로써 박수받는 장면이 화제다. 새마을 사업 관련 예산이 모두 새로 살아난 사연이 대표적이다. 현 정부 출범 후 대폭 삭감이 예고됐던 `새마을 ODA(공적 개발 원조) 사업`이 내년도 예산안에서 되살아났을 뿐 아니라 지난해 박근혜 정부가 짠 예산(229억여원)보다 오히려 현 정부가 제출한 내년도 예산(251억여 원)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내년 정부 예산안에는 코이카가 해외에서 추진하는 새마을 ODA 관련 16개 사업에 251억8천700만원이 배정됐다. 이 예산안은 원안대로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심사를 통과해 현재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심의를 받고 있다. 정부는 올해 예산에 12억원이 배정됐던 `르완다 농촌공동체 개발사업`에 내년에는 42억원을 편성했다. `필리핀 파나이섬 고지대 새마을 농촌 종합개발 사업`은 21억원(올해는 15억원), `키르기스공화국 새마을 기반 농촌 개발 시범사업`은 9억9천만원(올해는 5천만원)으로 올해보다 늘었다. 올 예산에 5천만원이 편성됐던 `에티오피아 암하라주 새마을운동 사업`예산은 15억3천만원이 편성돼 30배가 늘었다. 상전벽해의 변화다.당초 지난 6월 외교부와 코이카 등 관계기관들은 현 정부 인수위 격인 국정기획자문위원회에 “`새마을`이란 말이 들어간 사업을 없애겠다”고 했고, 국회에도 “기존 사업에서 `새마을운동` 관련 요소를 제거하고 2018년부터 신규 사업은 추진하지 않겠다”고 보고한 바 있다.이에 따라 자유한국당 등에서는 “문재인 정부의 `박정희 지우기`”라고 크게 반발했던 기억이 생생하다.이처럼 모조리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새마을 ODA 사업 예산이 되살아난 것은 지난 13일 마닐라 국제컨벤션센터(PICC)에서 열린 제19차 한·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아웅산 수지 미얀마 국가고문 등 일부 국가 정상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한국의 새마을운동 지원에 대해 감사를 표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사업 축소 및 폐지에 들어간 상황에서 감사 인사를 받았으니 민망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문 대통령은 청와대 참모들에게 “새마을운동을 비롯해 전(前) 정부 추진 내용이라도 성과가 있다면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지난 정부의 정책이라고 해서 무조건 적폐로 몰아붙이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잘된 것은 잘된 대로, 잘못된 것은 잘못된 대로 평가하는 것이 옳다. 이런 대통령의 변심은 바람직한 변신(變身)이다.

2017-12-01

가성비의 마법

▲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평창 롱패딩 열풍이 불고 있다. 지난 22일 오전 6시30분, 서울 롯데백화점 잠실점에서는 개장시간이 한참 남은 이른 시간부터 1천여 명의 인파가 몰리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롯데백화점이 화제의 평창 롱패딩을 이날부터 판매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잠실점이 준비한 패딩은 1천장이었지만 당일 새벽 1시30분에 대기 인원이 500명을 넘어섰고, 오전 6시에는 이미 1천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오전 10시30분 백화점이 문을 여는 시간에는 이미 매진이 된 셈이다. 평창 롱패딩을 판매한 영등포점, 김포공항점, 경기도 안양평촌점 등 나머지 3곳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모두 백화점이 문을 열기도 전에 물량보다 많은 인원이 줄을 서 번호표 배부를 마감해야 했다. 지난 18일 800장이 개점 15분 만에 품절된 데 이은 `초고속 완판`이었다. 원래 운동선수와 감독이 경기장 벤치에서 착용하는 `벤치파카`인 롱패딩은 지난해 겨울 연예인들이 즐겨 입으면서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중·고생과 트렌드에 민감한 20·30대가 열풍을 이끌고 있다. 중·고생 사이에서는 `요즘 짧은 패딩 입으면 아재`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평창 롱패딩이 오프라인은 물론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며 전 국민의 관심상품으로 등극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유통전문가들은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좋은 유행 아이템이기 때문이란 분석을 내놨다. 구스 다운(거위 충전재) 소재인 이 제품의 한 벌 가격은 14만9천원이다. 품질이나 성능은 기존 패션 브랜드 못지않지만 가격이 절반이다. 가성비가 좋다는 평가가 나올 만하다. 하지만 가성비 하나 만으로 추운 겨울 밤을 새우며 평창 롱패딩 구매 경쟁에 나선 소비심리를 완전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수출·증시 등 경제 지표는 그리 나쁘지 않지만 롱패딩을 즐겨 입는 청소년과 학생들의 취업이나 소득 상황 등은 그리 좋아지지 않는 사회적 환경이 열풍을 부추겼으리라는 분석에도 힘이 실린다. 일부에서는 지난 2011~2012년 전국의 중고생들을 중심으로 불어닥친 `노스페이스 패딩 열풍`에 빗대 `등골 브레이커의 재림`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당시 노스페이스 패딩은 가격이 40~50만원으로 비싸서 부모들이 사주기엔 부담스러운 가격대였으나 자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지갑을 열었다. 이번에는 성능 대비 가격이 착하니 비교 불가다.가성비 좋은 제품은 어디서나 인기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맛집으로 소문난 집 음식들이다. 대구에서 고등학교까지 학창시절을 보낸 필자가 서울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가장 인상적으로 느꼈던 일 중에 한 가지가 바로 식당 앞에 줄을 서서 먹는 풍경이었다. 대구에서는 아무리 맛집으로 소문난 집이라 해도 사람이 붐비는 정도이지 자리가 없어서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먹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는 아무리 맛있는 집이라 해도 한 끼 식사하는 데 줄 서서 먹으려 하지 않는 대구사람들의 기질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넘쳐나는 서울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어디건 음식이 싸고 맛있다는 소문이 나면 으레껏 줄을 서야 했다. 점심시간과 식당 좌석은 한정돼 있고, 사람은 한꺼번에 몰리니 필연적인 결과다. 지금도 여의도 국회의사당 근처나 청와대 인근 삼청동 식당가에서는 점심시간을 전후해 식당 앞에 줄을 서있는 풍경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그럼, `우리 사회에서 가성비가 가장 나쁜 분야는 어딜까요?`라고, 한번 물어보자. 아마 꽤 많은 국민들이 `정치판`이란 답을 내놓을 듯 싶다. 모든 국민들이 다함께 잘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공약을 걸고 당선된 정치인들은 우리 국민들의 혈세를 잘 배분해 모든 국민들을 잘 살게 할 책무가 있다. 이를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할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많은 국민들이 백화점이 아니라 우리 정치 앞에 줄을 서는,`가성비의 마법`은 언제쯤 볼 수 있을까.

2017-11-24

포항 지진과 탈원전 논란

▲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지난 15일 경북 포항에서 발생한 진도 5.4의 지진으로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에 대한 찬반 논쟁이 다시 뜨거워지고 있다. 탈원전을 주장해온 환경단체들은 탈원전정책을 서둘러야 한다고 촉구하고 나섰고, 원자력업계는 지진위험이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반박했다.천재지변속에서도 탈원전 정책을 둘러싼 찬반논란이 엇갈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여러 주요 정책 가운데 여야가 가장 첨예하게 부딪치고 있는 정책이 바로 탈원전정책이기 때문이다. 경북 동해안 지역의 경우 울진에 6기, 경주 월성에 6기 원전이 가동중이고, 향후 추가건설 계획은 모두 무산될 처지여서 지역민들도 탈원전정책의 향방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정치권의 탈원전정책에 대한 입장차는 한 마디로 천양지차(天壤之差)다.문재인 대통령의 선거공약으로 처음 제기된 탈원전 정책은 1979년 미국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사고, 1986년 소련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 등 세 개의 유명한 원전 사고의 영향을 받았다. 한 마디로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원전을 더이상 사용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에 맞선 자유한국당의 탈원전정책에 대한 비판은 매우 구체적이다. 최근 최교일(영주·문경·예천) 의원이 원내대책회의에서 이 내용을 조목조목 정리·발표해 관심을 끌었다. 최 의원은 현 정부의 탈원전정책을 12가지 항목으로 나눠 비판했다.우선 우리나라의 원전정책 결정이 외국의 원전 중단절차와 비교해 너무 짧고, 졸속으로 판단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이다. 독일은 탈원전을 결정하는데 25년이 걸렸으며, 국회에서 논의를 했으며, 스위스는 33년이 걸렸고, 국민투표로 결정했다. 스웨덴 역시 30년 간 5회의 국민투표를 거쳐 결정했으며, 벨기에는 4년이 걸렸고, 국회에서 입법을 했다는 게 골자다.또 30년 전 원전 건설을 중단했던 영국·스웨덴 등 선진국들이 최근 원전 건설을 재개했다는 점을 들었다. 영국은 보유하고 있는 40기 이상의 원전 중 15기 정도만 운영하고 나머지는 폐로 결정을 했으나, 전력이 모자라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전기를 수입해오다 결국 원전 건설 재개를 결정했다. 스웨덴 역시 10기가 넘는 원전을 운영하다 1980년 추가 원전 건설을 중단하기로 했으나 40여 년이 지난 올해 기존 원전을 대체하는 원전 건설을 하겠다고 최종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현재 총 466개 원전이 가동 중이며, 59기가 건설 중일 뿐 아니라, 향후 건설계획중인 곳만 164기란 국제에너지기구(IEA)의 통계도 내놨다.심지어 지난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피해국인 일본도 원전 가동을 재개했다는 점을 들었다. 아베 정부는 지난 2015년 8월 가고시마현의 센다이 1호기 재가동을 시작으로 원전을 재가동하기 시작했으며, 최근 향후 2030년까지 원전 비중을 22%까지 확대하기로 하는 에너지 계획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원전을 포기한 독일의 경우 가정용 전기료가 우리나라의 3배에 이른다는 우려도 제기됐다.특히 탈원전정책의 골자가 안전성 문제인데,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스웨덴, 중국 등 우리나라보다 안전기준이나 안전의식이 높은 대부분의 선진국이 원전을 건설하는데, 우리나라만 안전성을 문제삼아 중단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논리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기술을 보유해 EU 인증을 통과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밖에 원전은 국산화율 96%여서 직·간접 일자리가 30만개에 이르고, 태양광 발전비중이 10%를 넘으면 이에 상응하는 LNG 예비발전소 건설이 필요하다는 문제점도 나왔다.국가에너지 정책은 국가의 백년대계에 해당한다. 따라서 탈원전정책의 지지여부는 주권자인 국민의 선택에 달려있다.다만 정치권이 이런 논쟁을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생산적인 논쟁`으로 승화시켜주기를 바랄 뿐이다.

2017-11-17

갈 길 먼 민주주의

▲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국회 연설이 있었던 지난 8일, 국회의사당 일대는 혼란속에 빠졌다.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을 놓고, 찬성과 반대 집회 참가자들이 뒤섞여 북새통으로 변한 것이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민중당 등 220여 개 시민단체가 모여 만든 `노(NO)트럼프 공동행동(공동행동)`은 오전 10시부터 국회 앞 서울 지하철 9호선 국회의사당역 2번 출구 앞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국회 연설을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대중교통수단인 버스가 다니는 국회앞 대로를 점거한 채 진행된 집회에는 주최측 추산 1천명(경찰 추산 600명)이 참가했다. 집회 참가자들의 손에는 `NO 트럼프, NO WAR! 전쟁 미치광이 트럼프는 국회에서 물러가라`는 글귀가 쓰인 피켓이 들려있었다. 공동행동 측은 “트럼프 국회 연설은 이 나라 국민에 대한 모욕이자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인 자들의 기를 높이는 결과만을 낳는, 어리석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 그지 없는 일”이라며 “북한 핵을 향한 최대한의 압박과 제재가 천명됐고, 심지어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이 북한과 교역 및 사업을 모두 중단해야 한다고 촉구했을 뿐 아니라 군사적 긴장을 높이는 모든 수단을 강구하겠다는 발표에 아연실색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날 공동행동 측은 트럼프 대통령 얼굴이 그려진 현수막에 소금을 뿌린 뒤 이를 찢는 퍼포먼스도 벌였다.또 한켠에서는 `트럼프 대통령 환영, 한·미 동맹 강화`를 주장하는 대한애국당 당원들의 가두시위가 펼쳐졌다. 주최측 추산 1만5천명(경찰 추산 8천명)의 일부 참가자들은 성조기와 태극기를 양손에 들었고, 또 다른 참가자들은 `환영, 트럼프 웰컴` `한미동맹강화로 전쟁억지` 등이 적힌 피켓을 들고 트럼프 대통령 환영을 외쳤다.완전히 정반대 주장을 펴는 두 집회 참가자들이 함께 모이다보니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대한애국당 소속 보수단체 회원들이 국회방면으로 이동하며 공동행동 측 집회 진영으로 진입하면서 양측 간 충돌이 빚어졌다. 서로 밀고 밀리며 힘겨루기를 펼치던 집회 참가자들은 감정이 격해지자 욕설과 함께 폭력사태로 이어졌다. 대한애국당 당원으로 보이는, 머리가 하얗게 센 한 노인이 “이 나쁜 놈들아! 한미동맹 강화해야 하는데, 이게 무슨 짓거리냐”라고 질타했다. 말이 떨어지자말자 피켓을 든채 시위중이던 한 노인이 “무슨 소리냐! 당신들이 제 정신이 아닌게지. 한반도 위기를 이용해 전쟁무기나 팔아먹는 트럼프 대통령이 뭐가 좋다고 그러냐”고 맞받았다. 그러자“순 빨갱이 같은 놈들이네”라며 욕설을 퍼부었고, 옆에 서있던 민중당 집회 참가자들도“나라 팔아먹는 매국노 같은 인간들이네”라고 고함을 치며 몸싸움이 붙었다. 그 와중에 들고있던 피켓 막대기가 날아가고, 주먹이 날아다녔다. 현장에서 서울에 사는 김모(56)씨는 대한애국당 회원에게 막대기로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가 경찰 구급대의 치료를 받고 귀가하기도 했다. 몸싸움과 욕설을 지나 주먹질과 발길질이 오가는 험악한 상황이 연출되자 경찰이 즉각 투입돼 양측을 분리하면서 상황이 종료됐다.충돌이 끝나고 소강상태가 된 후 한참동안 시위 현장에서는 확성기로 목청높여 외치던 시위 주동자들의 목소리가 지하철 역을 찾는 시민들의 귀를 따갑게 만들고 있었다. 북한의 핵·미사일도발로 안보 위기가 고조되는 시점에 한국을 방문한 동맹국 미국 대통령이 국회 연설을 하는 날, 국회 앞마당에서 이처럼 질퍽한 욕설로 맞이할 이유가 있는 걸까.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두 집회 참가자들이 서로를 증오어린 시선과 말투로 바라보는 모습이었다. 생각이 다르다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은 옳지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저 생각이 다를 뿐 생각이 틀렸다고 비난해선 안 된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도 경청하고, 존중하며 다 함께 나아가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아닌가. 그런 점에서 우리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2017-11-10

조마조마한 소득주도 성장

▲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지난 1일 문재인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IMF 외환위기에 대한 평가였다. 문 대통령은 IMF 외환위기를 단순한 경제위기가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의 삶을 뒤흔들었던 역사적 사건으로 표현했다. 벌써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 경제가 매우 건실해졌는데도 불구하고 그 후유증이 국민들의 삶을 바꾸어버렸다는 것이다. 후유증의 사례도 다양하게 제시됐다. 저성장과 실업이 구조화 됐고, 중산층이라는 자부심이 사라졌다.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송두리째 흔들린 삶의 기반을 복구하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능력과 책임에 맡겨졌고, 작은 정부가 선(善)이라는 고정관념 속에서 국민 개개인은 자신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했다. 선배 세대들의 좌절은 청년들로 하여금 전문직이나 공공부문 같은 안정적인 직장을 열망하도록 만들었고, 무한경쟁사회에서 나를 지켜주는 것은 상식과 원칙이 아니더라는 생각도 커졌다. 이렇듯 외환 위기가 바꾸어놓은 사회경제구조가 국민의 삶을 무너뜨렸다고 진단하면서 새 정부의 책무를 보다 민주적인 나라, 보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로 규정했다.그러면서 내놓은 것이 바로 `사람중심 경제`다. `사람중심 경제`는 경제성장의 과실이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는 경제, 일자리와 늘어난 가계소득이 내수를 이끌어 성장하는 경제, 혁신창업과 새로운 산업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경제다. 이른바 모든 사람, 모든 기업이 공정한 기회와 규칙 속에서 경쟁하는 경제를 표방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핵심축이 바로 일자리와 소득주도 성장론이다.소득주도 성장론은 이전 정부들이 주력해온 수출주도 성장론의 대안적인 성장모델이다. `분수효과`로 대변될 수 있는 소득주도 성장은 노동소득을 늘리고, 분배의 형평성을 제고함으로써 경제의 성장활력을 높이는 정책방향이다. 노동소득을 늘리고, 소득 격차를 해소함으로써 단순히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경제성장으로까지 이어질 것을 기대한다. 양극화 심화와 사회경제적 분배·재분배 구조의 왜곡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새로운 성장동력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구체적인 정책실현 방안으로는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 임금인상, 재정지출 확대 등이 제시되고 있다.소득주도 성장론이 전면으로 등장한 데는 수출 주도성장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진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사실 내수가 수출과 함께 경제성장을 이끌어가도록 하는 것은 국민들의 삶의 질을 제고하고,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세 저하를 막기 위해 중요한 과제다. 이미 올해 예산안도 그 기준에 맞춰 짜여졌다. 국민들의 가처분 소득을 늘려주는 예산을 대폭 증액했다. 가계의 기초소득을 늘리고, 생계비 부담을 줄여줌으로써 소비나 저축에 여력이 생기도록 하려는 것이다. 주거급여와 교육급여를 인상해 기초생활보장 급여를 현실화했다. 가계의 의료비 부담을 대폭 줄이고 국가 책임을 높였다. 5세 이하 아동의 아동수당 도입, 노인 기초연금이나 장애인 연금 인상도 같은 맥락이다. 부자와 대기업이 세금을 좀 더 부담하는 방향으로 세법 개정도 추진한다.하지만 소득주도 성장론은 경제의 생산성이나 잠재성장력 등 공급측면을 강조해온 주류 경제학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다보니 아직 검증된 이론은 아니다. 더구나 자영업자가 많고, 시기적으로 한계기업이 폭증한 국내경제 상황을 생각하면 정책의 실효가 있겠느냐는 비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 정부의 재정건전성 악화나 고령화 및 가계부채 급증이 우려된다는 점 등도 소득주도 성장정책의 부담이 될 수 있다. 이유야 어떻든 기대와 우려 속에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정책이 진행중인 만큼 무조건 반대만 외치는 게 능사는 아니다. 비록 조마조마한 소득주도 성장론이지만 장·단점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그래서 부작용은 잡아나가고, 효과는 극대화할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해 주길 바란다.

2017-11-03

새로운 숙의민주주의

▲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옳다``그르다`와 `같다``다르다`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이다. 옳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나 같다의 반대말인 다르다는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다. 그냥 다른 것일 뿐이다. 이것을 다른 것은 그른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다. 특히 우리 정치판에서는 같은 당이 아닌 다른 당의 주장은 무조건 틀린 것이라고 주장하고 본다. 그냥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다른 주장이라고 짚고 넘어가는 성숙한 정치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반대를 위한 반대가 일상이다. 최근 나온 신고리5·6호기 공론화위원회의 결정은 이같은 우리 정치판의 타성을 크게 흔들어놨다. 신고리 5·6호기 공사재개 권고결정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으로 떠올랐다. 정부가 결정해야 할 국민적 관심사안을 공론화위원회에 논의하도록 맡겼고, 그 권고결정을 정부가 받아들이자 대의민주주의에 이은 `숙의민주주의`란 신조어로 등장했다. 대의민주주의는 수많은 사람이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직접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갈등이 심한 국정현안에서는 대의민주주의가 무력한 양상을 보여왔다. 특정 지역에서는 국론분열의 양상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계층의 국민들을 모아 관계 전문가의 의견을 골고루 들려주고 그후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적 정당성의 모델을 선보인 것은 숙의민주주의 출현의 역사적 배경으로 충분했다. 일부에서는 집단 지성의 합리성에 의한 `신의 한 수`였다는 평가도 내놨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25일 국무회의에서 “이번 공론화 과정은 우리 사회 민주주의를 한층 성숙시키고 사회적 갈등 현안 해결에 새로운 모델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면서 “국가적 갈등과제를 소수의 전문가들이 결정하고 추진하기 보다는 시민들이 공론의 장에 직접 참여하고 여기서 도출된 사회적 합의를 토대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높이 평가했다. 특히 문 대통령은 “갈수록 빈발하는 대형 갈등과제를 사회적 합의를 통해 해결하는 지혜가 절실하다”면서 “이번 공론화 경험을 통해 사회적 갈등 현안을 해결하는 다양한 사회적 대화와 대타협이 더욱 활발해지길 기대한다”고도 했다.공사중지로 1천억원에 가까운 혈세를 낭비했다는 야당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 시행된 공론화위원회 숙의과정은 음미해 볼만하다는 평가가 적지않다. 처음에는 공론화위원회의 결정에 맡기겠다는 정부 발표에 의구심을 표명하는 이들이 많았다. 탈원전정책 들러리로 공론화위원회를 활용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었다. 결론적으로 공론화위원회가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는 점은 무척 다행스럽다.문제는 향후 탈원전정책은 어떻게 할 것이냐다. 탈원전정책은 국가의 백년대계에 해당하는 에너지 정책의 향방을 가르는 국책과제다.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을 외치며 원전건설을 중지하고 신재생에너지로 대체해 나가겠다는 것 역시 하나의 정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상당수 선진국들이 여전히 원전건설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를 되짚어봐야 한다. 최근 만난 찰스 헤이 영국대사도 “유럽 각국은 저탄소정책에만 공조할 뿐 각국마다 다른 에너지 정책을 펼치고 있다”면서도 “프랑스는 에너지 80%를 원전에서 충당하고 있으며, 원전 역사가 오랜 영국도 신재생에너지는 아직 한계가 있어서 기본 에너지수급은 원전에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탈원전정책을 국가의 일관된 에너지 정책으로 채택하는데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숙의민주주의` 모델로 제안한다. 국가의 대계를 좌우할 주요 정책을 추진하는데 국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점을 감안, 국회를 중심으로 `탈원전 공론화위원회`를 구성, 결정하도록 하는 방안은 어떨까. 국회와 청와대의 생각이 궁금하다.

2017-10-27

음모론의 향기

▲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황당하지만 믿고 싶은 `매혹적인 거짓말`인 음모론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음모론의 원조는 프리메이슨 조직이나 일루미나티같이 중세로부터 내려오는 비밀 조직들에서부터 비롯된다. 최근에는 에이즈 바이러스는 흑인, 동성애자, 마약 상용자를 청소하기 위해 미국 국방부가 만들어냈다는 주장이나, 9·11 테러의 배후 세력은 빈 라덴이 이끄는 테러 조직이 아니라 이스라엘 첩보부나 미국 정부라는 주장이 있었다. 또 미국 아폴로 우주선의 달 착륙 사건이 사실은 조작된 거짓말이라는 주장이 그럴듯하게 퍼져 SNS를 뜨겁게 달구기도 했다.음모론은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는 인간의 속성에서 싹튼다. 쉽게 설명하기 힘든 현상에 대해 그 이유와 의미를 찾다보면 깨달음을 뒷받침하는 정보만 눈에 들어오고, `자기중심적 편파(Egocentric bias)`라든가 `인지적 불일치(Cognitive dissonance)` 등의 심리적 편향을 통해 점점 믿음이 강해진다. 한번 음모론의 씨앗이 싹트면 점점 더 많은 사건들이 동일한 의미로 재통합되며, 나름대로의 체계를 이루어 서로가 서로를 뒷받침하며, 음모론은 마른 낙엽에 불붙듯이 순식간에 번져간다. 어느새 진실과 이성을 압도할 정도의 힘을 갖추게 된다. 결국 음모론에 매혹되는 것은 운명과 자연 속에서 길을 잃기 쉬운 인간의 취약함때문이다.우리 국회나 법원, 청와대 주변에서도 음모론에 가까운 주장들이 부쩍 늘었다. 우선 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로 재판을 받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행동과 말을 보라. 법원의 추가 구속영장 발부에 대한 박 전 대통령의 입장문을 읽다보면 대단한 음모(?)가 깔려있는 듯 싶다. 박 전 대통령은 입장문을 통해 “한 사람에 대한 믿음이 상상조차 하지 못한 배신으로 되돌아왔고, 이로 인해 저는 모든 명예와 삶을 잃었다”면서도 “사사로운 인연을 위해서 대통령 권한을 남용한 사실이 없다는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믿음과 법이 정한 절차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심신의 고통을 인내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제 정치적 외풍과 여론의 압력에도 오직 헌법과 양심에 따른 재판을 할 것이라는 재판부에 대한 믿음이 더는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사법부를 부인하는 듯한 발언을 내놨다. 박 전 대통령은 이어 “하지만 포기하지 않겠다. 저를 믿고 지지해주시는 분들이 있고 언젠가는 반드시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 믿기 때문”이라고 자신의 억울함과 결백을 주장했다.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 했던가. 문재인 정부의 핵심인물인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이 박 전 대통령 구속연장 여부 결정 하루전에 세월호 관련 대통령 보고시점이 조작됐다는 사실을 발표해 정치적 논란을 빚었다. 임 실장은 이날 생방송 인터뷰에서“아침에 보고받자마자 발표하게 된 것은 관련사실의 중대성도 있고, 제가 관련사실이 발견되는 대로 시점은 정치적인 부분은 고려하지 않고 기록물은 이관하고 최소절차를 밟은 후 공개가 필요한 부분은 공개하겠다는 원칙에 따른 것”이라고 정치적 고려는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렇다 해도 호사가들은 박근혜 정부로부터 아무런 서류도 넘겨받지 못했다는 문재인 정부가, 필요할 때 마다 문제가 될 만한 중요 문서들을 `시기적절하게` 발견해 발표하곤 하는 게 정상적인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고 꼬집고 있다. 한마디로 뭔가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한, 음모의 냄새가 짙단다. 특히 지난달 말 발견한 문서와 함께 세월호 보고시점 변경사실을 파악하는 데 열흘 이상 지체됐다는 점도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정치판에서는 상상, 그 이상의 일들도 쉽게 일어난다. 주호영 바른정당 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는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의 김원배 이사가 사의를 표명한 데 대해 “(이사를) 겁박해 쫓아내는 것은 민주질서에 대한 도전이자 침해”라면서 “정권임기는 5년이고, 공소시효는 훨씬 길다. 나중에 어떻게 감당할지 걱정”이라며 음모론의 한 자락을 드러냈다. 판사출신의 정치인이 그냥 봐 넘기기엔 음모론의 향기가 너무 짙었던 모양이다.

2017-10-20

같은 뜻 다른 말

▲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정치인들은 같은 뜻이지만 다르게 말을 하는데 익숙하다. 최근 보수대통합을 통해 자유한국당을 다시 일으켜 세울 심산인 홍준표 대표가 바른정당에 대해 “당대 당 통합을 하자”는 입장을 견지하는 게 비근한 사례다. 홍 대표의 속내야 능히 짐작이 간다. 가는 길이 달라 마주 대하기 불편한 몇몇 의원들은 빼고, 나머지 의원들의 개별입당을 간절히 원한다. 그러나 남의 당 의원들을 어떻게든 영입해 몸피를 불리려는 참이다. 찬밥 더운밥 가릴 수 있나. 일단 `당대 당 통합`을 하자고 주장해야 통합논의를 위해 나선 한국당 의원들에게도 힘이 실린다. 자강파 의원들의 눈치를 보는 바른정당 통합파 의원들도 한결 모양새가 낫다. 이렇듯 정당간 힘겨루기나 헤쳐모여 논의에서는 속셈과 다른 말이 요긴하다. 겉다르고 속다르다고 할 지 모르지만 이 정도는 정치판에서 애교수준이다. 뻔하지만 다른 말을 해야하는 상황은 권력의 심장부라 할 청와대와 대통령에게도 자주 닥친다. 정부 출범이후 비서동 근무, 직원식당 출입, 기업인들과 맥주회동 등 소통과 탈권위주의적 행보로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이지만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깽판`을 작심한 듯한 무력도발은 문 대통령을 곤혹스럽게 한다. 베를린연설에서 `신한반도 평화비전`을 제시한 문 대통령은 북한과 `대화를 통한 한반도 평화추구` 의지를 거듭 강조했으나 잇따른 미사일 도발과 핵실험이 터져나오면서 `대화` 운운할 명분 마저 잃고 말았다. 상황이 이러니 문 대통령이 집권초기 구상해 놓은 대북 정책마저 스텝이 꼬이고 말았다. 지난 9월8일, 문 대통령이 북한의 6차 핵실험 직후 사드 잔여발사대 임시배치를 알리며 국민들의 양해를 구했을 때의 일이다. 대통령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갈수록 고도화하고 있는 상황속에서 그에 대한 방어능력을 최대한 높여나가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사드 배치이유로 들었다. 거기까지였으면 좋았을걸 그랬다. 국민들에 대한 약속을 어겼다는 자괴심 때문이었을까. 문 대통령은 “이번 사드 배치는 안보의 엄중함과 시급성을 감안한 임시배치”라며 “사드체계의 최종배치 여부는 여러 번 약속드린 바와 같이 엄격한 일반 환경영향평가 후 결정될 것”이라고 사족을 달았다. 북한의 잇따른 도발에 사드배치가 최선의 조치라고 생각한다고 해놓고, 이번 배치가 임시배치란 군더더기 해명을 덧붙이는 바람에 “이게 무슨 말이냐”고 혀를 찬 국민들이 적지않았다. 이미 배치된 걸 임시배치란 말로 호도한 것은 주민 반발을 누그러뜨리려는 목적이었을까.또 다른 사례다. 최근 한미양국이 FTA 개정협상을 하기로 했다는 언론보도가 나오자 야당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요지는 한미FTA협상을 추진한 이명박 정부와 당시 여당에게 `제2의 을사늑약``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라고 비난해놓고, 집권한 뒤 미국의 한미FTA 개정요구에 아무소리 못하고 협상에 합의하면서 국익우선을 언급하는 것은 너무 뻔뻔하다는 것이다. “한미FTA를 두고 남이 하면 매국노, 내가 하면 국익우선이라는 이중 잣대를 거두라”는 충고까지 나왔다. 청와대의 해명은 이랬다. “일부 언론이 트럼프 대통령의 `FTA 폐기` 압박에 `백기 들었다`고 보도하고 있지만,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 우리 정부는 한미 FTA 개정협상에 앞서 한미 FTA 효과분석 검토결과를 미측에 충분히 설명했고, 한미 양국은 FTA 개정절차 추진에 합의한 수준에 불과하다.” 즉, 우리 정부는 개정협상 개시를 위한 `통상절차법`상 경제적 타당성 검토, 공청회, 국회보고 등 국내절차를 진행해 나갈 예정이며, 공식 개정협상은 법적 절차 완료 이후 가능함을 명확히 했다는 설명이다. 개정협상 절차를 진행하면 개정협상이 시작된 것이 맞다. 청와대의 해명이 구차하게 들린 것은 나만은 아니었을 듯 하다.`같은 뜻 다른 말`은 진실과 거짓, 그 사이 어디쯤을 겨냥한다. 앞으로는 언제나 당당한 대통령과 청와대가 보고싶다.

2017-10-13

후회는 있어도 참회는 없다

▲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야당으로 전락한 자유한국당의 행보가 힘겹다. 뼈를 깎는 자성으로 참회하고, 새로운 인재를 영입해 새 바람을 일으키려해도 마땅치 않다. 한국당은 아직도 친박청산,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출당문제 조차 매듭짓지 못한 채 엉거주춤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재판이 진행중인 박 전 대통령의 태도도 많은 국민들의 반감을 사고 있다. 여러 언론보도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아직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통령의 심사를 요약해 보면 이렇다. “나는 나라를 위해 내 삶을 바쳤다. 부정한 돈은 단 한푼도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내가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나. 최순실에게 자료를 보낸 것도 나라를 더 잘 운영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재판에서 나의 억울함을 밝히겠다.”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레노어 루스벨트는 “자기 자신은 머리로 다스리고, 다른 이들을 가슴으로 대하라”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이 대통령을 지낸 만큼 최측근인 최순실에게 특혜가 주어졌다면 박 전 대통령도 당연히 법적·정치적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돈을 직접 받았느냐 안받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모두가 본인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닌가. 박 전 대통령이 자신의 잘못은 머리로, 국민들에게는 가슴으로 대했다면 어땠을까. 이 모든 사태가 모두 자신의 잘못때문이며, 국민들앞에 용서를 구하고, 모든 것을 짊어지고 물러났다면…. 자유한국당 친박계 의원들의 무책임한 태도도 논란거리다. 선거때마다 명함이나 현수막, 팸플릿에 대문짝만하게 박 전 대통령의 사진을 싣고, 박 전 대통령의 후광을 업으려 용쓰던 사람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된 후 함께 책임지겠다고 나선 사람이 하나도 없다. 친박 청산없이 보수통합이 어려우리란 정치적 전망은 애써 외면한다. 자진사퇴 요구도 못들은 척 눈깜짝하지 않는다. 다만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지지않으려니 박 전 대통령에 관련한 모임엔 얼굴을 내비친다. 28일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 추가발부 신청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에 앞장선 10여 명 친박계 의원들의 궁색하고 낯뜨거운 속내다.`최순실 국정농단게이트`와 대통령 탄핵·파면, 대선으로 이어지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묵묵히 지켜본 대구 경북민들의 심경은 어떨까. 사태 초기에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그래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측근인 최순실에게 힘을 실어주다 생긴 일이고, 부정한 돈을 받은 것도 아니지 않느냐. 대통령직에서도 파면됐고, 감옥에 갇혔다. 이제 야당이 정권을 잡았으니 사면해주면 안되나”하는 반응들이 적지않았다. 그랬던 지역민들이 대선이후 자유한국당이 당의 면모를 새롭게 바꾸고 혁신하는 데 힘겨워하는데다, 민주당 정책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한국당이 대항세력으로 똑바로 서기를 바란다. 그래선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날카로워지는 분위기다. 비판의 요지는 이렇다. “박 전 대통령이 모든 게 자신의 부덕탓이라고 시인하고, 국민에게 용서를 구하면 법원도 가혹한 중형을 선고하지 않을 것이다. 자유한국당 역시 박 전 대통령의 족쇄를 벗어나 힘을 얻는다면 그 이후 영어의 몸에서 더 빨리 벗어날 수 있을 것인데, 왜 반성하지 않나”`득총사욕(得寵思辱) 거안려위(居安慮危)`(명심보감 성심편)라 했다. `남에게 유달리 사랑을 받거든 앞으로 욕이 돌아올까를 생각하고, 편안히 살거든 앞으로 위험이 닥쳐올까를 미리 염려하라`는 뜻이다.국민들에게 유달리 많은 사랑을 받았던 박 전 대통령이 조금이라도 욕이 돌아올까를 걱정했다면 오늘 이같은 곤궁에 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집권여당으로 잘 나갈 때 정치적 위기가 닥쳐 야당이 될 수 있다는 걸 염려했다면 자유한국당 역시 오늘과 같은 곤궁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한국당의 위기는 `후회는 있어도 참회는 없는` 태도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가슴을 울리는 교훈이다.

2017-09-29

트럼프의 말폭탄

▲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상대의 실력을 모르고, 상대의 선의를 구별 못하고, 상대의 반응을 생각하지 않아서 우리는 종종 세상살이에서 낭패를 겪기도 한다. 조선후기의 학자 윤기 선생의 `무명자집(無名子集)`에 실린 `잡설(雜說)`중 한 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거미가 허공에 거미줄을 쳐 놓고 날아다니는 것들을 잡아먹으려고 기다렸다. 작은 놈으로는 모기, 파리에서부터 큰 놈으로는 매미에 이르기까지 걸리는 대로 잡아먹어 배를 채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벌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들었다. 거미는 재빨리 거미줄로 벌을 칭칭 감다가 갑자기 땅에 떨어지더니 배가 터져 죽었다. 벌의 독침에 쏘인 것이었다. 옆을 지나던 어떤 아이가 거미줄에 감겨 벗어나지 못하는 벌을 보고는 손을 뻗어 풀어주려고 하다가 벌의 독침에 쏘였다. 아이는 화가 나서 벌을 발로 밟아 짓이겨버렸다.” 얼핏보면 별 의미가 없을 듯 보이는 우화이지만 인간세태를 절묘하게 그려내며, 우리에게 깨우침을 준다.거미는 모든 날아다니는 것들을 얽어맬 수 있다는 것만 믿었지, 벌이 독침으로 자기를 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벌은 그저 독침만 쏘면 다 되는 줄 알아서, 자기를 해치는 자와 자기를 구해주는 자를 구별하지 못하고 닥치는 대로 쏘아대는 바람에 자기를 구해주려던 자가 도리어 자기를 해치도록 만들었다. 아이는 벌의 독침이 무섭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아서 벌을 곤경에서 벗어나도록 해 주려고 하다가 벌의 독침 또한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다. 서로에 대해 모르고 행동하는 것은 큰 잘못이 될 뿐이다.요즘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측 반응을 보면 거미와 벌, 어린아이가 등장하는 윤 선생의 우화를 떠올리게 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9일 첫 유엔총회 연설에서 “북한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다”고 호전적인 `말폭탄` 발언을 쏟아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걸음 더 나아가 북한의 김정은을 로켓맨으로 지칭하며, “로켓맨(김정은)은 자살 임무중….”이라고까지 했다. 일각에서는 트럼프의 파격적인 연설은 김정은의 미치광이 전략에 맞서는 또 다른 미치광이 전략이란 분석도 있고, 보수 지지층을 겨냥한 국내 정치용으로, 실제로 전쟁을 염두에 둔 발언은 아니란 설명도 나온다.북한측은 격렬한 반응을 내놨다. 유엔 총회 참석을 위해 미국 뉴욕에 도착한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강경발언에 대해 “`개는 짖어도 행렬은 간다`는 말이 있다”며 “개 짖는 소리로 우리를 놀라게 하려 생각했다면 그야말로 개꿈”이라고 주장했다. “개가 짖어도 행렬은 나간다(The dogs bark, but the caravan moves on)”라는 구절은 북한이 국제사회의 제재에도 굴복하지 않고 핵·미사일 개발을 지속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낼 때마다 사용했던 표현이다.다시 정리해보면 북한의 탄도미사일 도발과 북핵실험으로 촉발된 동북아 안보위기에 대해 트럼프가 극단적인 `말폭탄`을 던지고, 북한 외무상은 `개소리`란 막말로 맞받아친다. 그 와중에 우리의 청와대는 “북한을 최대한 압박해 비핵화로 나아가자”는 기조를 애써 유지하고 있다. 상대의 실력, 선의, 반응을 생각하지 못한 거미, 벌, 아이들이 맞이한 상황과 비슷하다.이 대목에서 문제의 핵심은 북한의 김정은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미사일 도발과 핵실험을 계속하고 있고, 이를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지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북한이 고집스럽게 핵보유국으로 나아가려는 것은`핵무장만이 체제유지를 위한 유일한 방책`이라고 믿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어떤 `채찍과 당근` 전략을 써서라도 북한을 대화의 장소에 나오도록 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북미회담이 됐든, 남북회담이 됐든 대화의 물꼬를 터야 한다. 그래야 상대의 눈높이에 맞춰 상대를 이해할 수 있고, 그런 연후에야 새로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17-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