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교육은 어디로 가는가

장규열 한동대 교수 세상이 어지럽다. 공약을 지키지 않는 정치와 끝없이 힘만 드는 경제. 약속을 저버리는 정치를 어떻게 믿으며 나아지지 않는 경제에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어른도 믿을 수 없는 게 정치라면 다음세대에게 우리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게 어려운 게 경제라면,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무엇을 배워야 하나. 약속을 지키는 성실함과 차곡차곡 모으는 꾸준함이 민생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일까. 공약을 파기한 정치인들이 진정어린 사과나 진솔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경제현상이라고 해도 오르는 물가와 어지러운 집값은 보통사람들의 일상을 어지럽힌다.다음세대를 기르는 우리의 교육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세상모습 그대로 거짓말과 혼돈을 주입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바르고 성실하며 착하고 아름답게’ 자라도록 가르쳐야 하는 학교는 날마다 마음이 무너진다. 교실에서 이야기한 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을 매일 만나는 선생님들은 오늘도 힘들다. 학교에서 배운대로 일하지 않는 어른들을 아이들은 눈치채지 않았을까. 교육은 학교만 하는 게 아니다. 집과 동네에서 만나고 스치며 세상을 배운다. 미디어와 언론은 아이들에게도 하염없이 열려있다. 숨길 수도 없고 감춰지지도 않는다. 세상의 부끄러움과 세상의 어두운 구석은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노출되어 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과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이 전혀 딴판이라면, 그런 교육을 우리는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왜 학교에 가는 것일까.교육적 견지에서 사회적 각성이 일어야 한다. 사회적 가치가 바로 서지 않고는 정상적 교육이 불가능하다. 선동과 기만이 그득한 세상에서 성실과 정직을 가르칠 방법이 없다. 혼돈과 격동만 가득한 일상에서 안정과 평화를 이야기할 수가 없다. 꿈과 비전이 야심과 욕심으로 변질되는 세상은 정상이 아니다. 용기와 상상력이 술수와 기만으로 해석되는 가르침은 교육이 아니다. 사람을 기르는 게 교육이지만, 고르지 못한 텃밭에 온전한 교육이 설 자리는 없다. 세상을 바꾸는 게 교육이지만 교육을 잘못 이해하는 세상도 문제가 아닐까. 사람을 도구화하는 교육은 부적절하다. 교육은 사람다운 사람을 길러야 한다.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을 키워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도록 이끌어야 한다.교육이 바로 서야 한다. 세상이 어지러워도 흔들리지 않을 용기를 가르쳐야 한다. 눈속임이 가득한 세상에 진정어린 정직함을 길러내야 한다. 서로서로 흉내나 내는 세파에 든든한 상상력을 전해주어야 한다. 다음세대의 시선이 넓은 세상을 향하도록 길러야 한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은데, 우리는 좁은 우물에 갇히지는 않았을까. 세상을 등진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는 교육이 되어야 하고, 무너진 세상을 바로잡는 교육으로 일어서야 한다. 어두운 세상에 빛을 던지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비뚤어진 정치와 어지러운 세상에는 교육이 희망을 던져야 한다. 교육이 살아야 세상이 선다.

2022-07-13

문화로 도시를 살린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지역의 인구문제가 심각하다. 저출산고령화가 지속적으로 진행되면서 수도권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동네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학령인구가 격감하면서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대학들이 늘어난다. 지역에서 젊은이들의 모습을 찾기가 어렵기만 하다. 대학들이 있어 청년들이 지역에 있기는 해도, 거의 모두 졸업과 함께 떠날 채비를 한다. 사회진출을 앞둔 대학생들에게 지역을 떠나는 까닭을 물으면, ‘지역에서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거나 ‘지역에 문화기반이 부실하여 지역에 머물 재미가 없다’는 답이 돌아온다. 그들이 장래를 걸만한 비전을 찾기 어려울 뿐 아니라, 일상을 이어갈 정주여건이 부실한 터이다. 인구문제는 사람 머릿수의 문제가 아니다. 젊은이들의 마음을 묶어낼 매력을 만들어야 한다.문화가 무엇일까. 사람에 따라 여러 생각이 가능하겠지만, 문화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어야 한다. 전통문화를 찾아내어 아름답게 보전하는 일이 중요한 만큼, 우리가 발딛고 사는 곳에 어떤 문화적 매력을 심을 것인지 생각을 모아야 한다. 문화는 독특하고 흥미로우며 이곳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지역의 정체성’이어야 한다. 한국문화는 한국에만 있듯이, 포항문화는 포항의 정체성이어야 한다. 지역의 정체성인 문화가 외지로부터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찾아와 살고싶게 만들어야 한다. 정주여건과 연계한 문화인식이 필요한 까닭이다. 다른 지역을 흉내내어서도 안 되고 다른 지역이 따라할 수도 없어야 한다. 독특한 정체성을 확보한 지역문화는 도시브랜딩의 기초가 된다.차별적이며 흥미진진한 지역문화를 일으키면, 우리만의 지역문화를 홍보와 마케팅에 활용하는 도시브랜딩에 적용하게 되고 사람을 당기고 청년을 머물게 하는 인구정책에 기여할 수 있다. 늘어나는 지역의 인구는 다시 다양한 문화적 저변을 발굴하고 창출하게 하고 지역의 문화적 지평을 넓히게 하여, 선순환적 문화정책과 도시정책이 가능해질 터이다. 청년들에게 지역을 왜 떠나느냐고 따져 물을 게 아니라, 지역이 먼저 전향적으로 풍요하고 재미있는 문화적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 외치지 않아도 찾아오는 도시를 만들어야 하고 붙들지 않아도 떠나지 않는 지역이 되어야 한다. 문화가 ‘정주여건’의 필수요소임을 명심해야 하며, 행복과 기쁨은 일상에서 만나는 문화의 풍성함과 흥미로움에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산업화의 결실이 사람을 당기는 외형적 유인이었다면, 문화적 풍요는 사람을 머물게 하는 매력의 열쇠인 셈이다. 문화도시로 선정되었음에 만족할 일이 아니며, 문화가 구체적으로 지역의 지속적인 발전에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고심해야 한다.오래된 고전이 물론 훌륭한 문화자산이지만, 오늘 일상에서 만들고 경험하는 재미와 향기는 우리 도시만의 문화적 매력과 긍지가 된다. 산업화로 여기까지 왔다면, 문화로 새 날개를 달아야 한다. 나라와 세계가 주목하는 도시브랜딩을 문화를 테마로 시도해야 한다. 글로벌시티로 다시 태어나는 포항이 되어야 한다. 문화를 살리면 도시가 깨어난다.

2022-07-06

다르고 새롭게, 만들어 알린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세월이 흘러도 바뀌지 않는 동네가 있는가 하면, 시간보다 빠르게 바뀌는 지역이 있다. 포항은 지난 반세기 동안 나라의 변화 맨 앞에 서서 바뀌는 세월을 주도하였다. 산업화의 기치를 포스코가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지역의 발전과 도시의 성장을 경험하였다.4차산업혁명의 문 앞에 섰지만, 경기의 침체와 경제적 난관을 함께 겪으며 우리는 모두 지역의 미래에 걱정이 앞선다. 디지털혁신을 도시가 어떻게 소화할 것인지 그리고 목전의 어려움을 어찌 헤쳐갈 것인지 우려의 눈길을 피할 수 없다. 젊은이들이 학업을 위해 제법 머무는 지역이면서도, 청년들을 붙들어 맬 매력이 보이지 않는다. 잘 가르친 보람이야 물론 있겠지만, 모두 떠나고 난 자리에 도시는 허탈하다.우리는 무엇으로 도시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확보해야 하는지. 유네스코(UNESCO)가 한 자락 힌트를 던진다.문화기반 관광산업(Cultural Heritage Based Tourism). 문화유산을 기초로 삼는 관광자원은 남들이 흉내내기가 힘들다. 우리만의 모습에 트렌디한 연출을 가미하여 차별적인 관광자원을 만들어낸다. 유네스코는 관광이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산업 가운데 하나이며, 많은 나라들의 주요 수입원이 되고 있다’고 정의하면서, ‘사람을 기초로 하는 산업이라 일자리창출과 지역경제에 크게 기여한다’고 치켜세웠다. 포항과 지역이 겨냥할 새로운 지향점으로 문화와 관광에 역점을 두어야 함은 자명하다. 지리적 특성과 문화적 강점에 주목하여 지역만의 관광자원을 창출할 가능성은 차고도 넘친다.첫째, 포항에서만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이곳에만 있는 그 무엇을 보고 만지고 경험하며 인증하기 위해 그들이 몰려와야 한다. 부득이 비슷한 무엇을 만들더라도, 하다못해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알리고 들려주어야 한다. 포항만의 ‘새로움’에 빠지도록 해야 한다. 어디서도 맛보지 못할 특별한 매력을 선사해야 한다.둘째, 문화를 트렌디하게 해석하여 내어놓아야 한다. 발굴하여 전시하는 일도 소중하지만, 문화가 품은 스토리를 다음세대도 쉽게 이해하고 가깝게 느끼도록 젊은 감각을 입혀야 한다. 우리의 고전 ‘춘향전’을 영어힙합뮤지컬로 다시 만들어 세계관객들에게 선보였던 기억이 있다. 놀라우리만큼 호응했던 외국인들은 한국 고전에 담긴 ‘고난을 기꺼이 참으면서도 기다리는 사랑’ 이야기에 아낌없는 박수를 돌려주었다.셋째, 과감하게 글로벌시장을 두드려야 한다. 국내 관광객뿐 아니라 세계 시민들을 위해 만들고 알리고 불러와야 한다. 우리만의 문화를 바탕으로 완전히 새로운 콘텐츠가 만들어졌다면, 자신있게 글로벌관광객들을 끌어와야 한다. 팬데믹의 끝자리에서 세상은 새로움을 만나러 떠날 채비를 한다. 잘 만드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지만, 잘 알리는 일도 반드시 챙겨야 한다. 홍보와 마케팅에도 강한 문화관광역량을 쌓아 올려야 한다. 콘텐츠가 다르다면 알리는 메시지도 달라야 한다. 다른 문화에 멋진 관광객이 몰릴 터이다.

2022-06-29

교육에 관한 한, 대통령은 다시 생각하시오

장규열 한동대 교수 대통령이 선언하였다. 그는 “교육부가 과학기술 인재를 공급하는 역할을 할 때만 의미가 있다”면서 혁신을 수행하지 않으면 교육부가 개혁 대상이 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현대문명에 과학기술이 차지하는 자리를 생각하면 틀린 말은 아니다. 국가경쟁력을 유지하기에 필요한 부분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이해할 만도 하다. 한발 더 나아가 “교육부도 경제부처”라는 대통령의 표현이나 “교육이 곧 안보”라는 총리의 인식에는 걱정이 앞선다. 사람을 무엇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나라를 운영하기 위해 쓸 연장쯤으로 보는 게 아닌가. 사람에게 일을 시켜 나라가 돈을 벌거나 사람을 앞세워 나라를 지키겠다는 발상은 해도 되는 것일까.교육부는 그 명칭조차 부침을 겪었다. 한때 ‘교육인적자원부’였으며 ‘교육과학기술부’가 되어 거의 사라질 뻔도 하였다. 오늘 대통령과 총리의 주문에 따르면, 다시 벼랑 위에 섰는가 싶다. 호연지기(浩然之氣)로 가득한 ‘사람’을 기르기보다 쓸 만한 연장을 만들어 나라를 도와야 하는 처지에 몰린 게 아닌가.반도체가 긴요한 산업임을 누가 모를까. 그렇다고 교육부가 하루 아침에 온통 과학기술과 반도체에 매몰되는 저 모습은 처연하기만 하다. 교육을 그저 행정행위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철학과 소신도 없이 교육을 관리만 해 온 끝자락인 셈이다. 이제 어찌할 터인가. 교육을 모르는 대통령에게 필요해 보이는 연장만 찍어낼 것인가, 아니면 이제라도 교육을 교육답게 다시 세울 것인가.세상은 끊임없이 흐르고 바뀐다. 공학만 해도 토목공학과 전기공학은 정말로 원자력공학과 반도체공학에 밀려났을까. 방금 성공궤도에 들어선 우주공학은 아직도 뒷자리일까. 생명공학과 의학은 벌써 쓸모가 시들었을까. 과학기술의 지평은 ‘반도체’밖에도 너무나 넓다.대통령과 총리는 조급한 심사를 벗어야 한다. 반도체와 과학기술이 물론 긴요하지만, 나라를 세울 덕목의 리스트는 그 외에도 차고도 넘친다. 나라를 이끌면서 좁은 한 우물에만 빠져서야 되겠는가. 방금 성공의 깃발을 올린 우주공학은 어찌 되는가. 레드카펫에 우뚝 선 대한민국의 영화와 세상 젊은이들의 트렌드를 이끄는 BTS. 손흥민은 유럽의 축구를 흔들고 임윤찬의 피아노는 세상도 놀랐다는데. 나라의 다음세대에게 반도체만 가르칠 것도 아니면서 교육부의 생명이 반도체와 인재육성에 달렸다니!교육은 할 일을 해야 한다. 누가 뭐래도, 교육은 사람을 길러야 한다. 파도치는 세상에 그 파도가 멎기를 기다리기보다, 폭풍우 속에라도 당당히 헤쳐갈 슬기와 용기를 길러줘야 한다.나 혼자 성공하여 외롭게 서기보다, 벗과 함께 이웃과 함께 따뜻하고 멋진 세상을 열어갈 측은지심도 길러줘야 한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이병주의 ‘행복어사전’은 이렇게 적는다. “파사데나의 젊은이들은 우주정복을 꿈꾸는데, 꽃은 한 번 밖에 피지 않는다.”우리 교육은, 어떤 사람을 기를 터인가.

2022-06-22

문화가 살아야 지역이 산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포항은 어떤 도시일까.포스코가 등장하여 국가산업화의 중심지역이었다.반세기가 지난 오늘, 지역이 포스코만으로 버틸 수가 없다. 상상과 창의를 발휘하여 새로운 포항을 만들어야 한다.디지털이 초래한 초연결사회(Superconnected Society)를 맞아 국내뿐 아니라 세계와도 함께 호흡하는 지역이 되어야 한다. 최근 보이는 포항의 변화를 반기면서도, 보다 역동적인 탈바꿈을 이끌어 세상이 주목하는 도시가 되었으면 한다. 지역의 자연조건과 문화토양은 더할 나위없이 탁월하다. 천혜의 바다와 수평선은 낭만과 향수를 부르기에 충분하고 풍성한 문화적 자산은 오늘의 콘텐츠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린다. 문화와 관광에 차별화와 탁월함을 보태면 포항은 세계 굴지의 중심도시로 도약하기에 손색이 없다.첫째, 전통문화에 기반을 둔 콘텐츠가 좋은 내용을 담고 있어도 ‘다음세대’와 ‘글로벌관객’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 지역이 초연결사회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콘텐츠적 솔루션을 찾아야 한다. 전통콘텐츠를 발굴하는 일이 소중한 만큼, 오늘 관객들이 환호하려면 새롭게 각색하고 연출하여 다양한 플랫폼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우리가 가진 문화원형이 가장 뿌리깊은 가능성을 가졌음은 분명하다. 문화원형을 내일의 콘텐츠로 재탄생시켜야 할 책임이 오늘 우리에게 있다. 포항과 지역이 가진 문화적 토양은 그럴 가능성으로 가득하다. 우리의 옛것을 미래자산으로 변화시킬 상상력이 필요하다.둘째, 문화도 개발해야 한다. 전통문화만 문화일까. 오늘 이 자리에서도 문화는 숨쉬듯 움직이며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다. 완전한 새것을 기대하기 보다 이미 있었던 것들을 새롭게 해석하고 신박하게 연결하여 이전에는 없었던 신선한 무엇을 탄생시켜야 한다. 아이폰이 그랬고 BTS가 보여주고 있다. 모방과 추격의 전성기는 막을 내렸다. 창의와 상상력으로 ‘다음문화’의 문을 열어야 한다. 신선한 충격은 문화와 트렌드가 불러와야 한다. 청년들이 지역에서 미래를 찾도록 유도하려면 그들의 싱싱한 생각과 느낌에 공감하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 문화도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한다.셋째, 글로벌환경에 주목해야 한다. 나라 안 경쟁의 틀을 넘어야 한다. 세계적 트렌드와 글로벌 시장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 세상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우리 문화의 디테일을 다듬어야 한다. 세계적 콘텐츠를 겨냥하는 포항의 문화를 탄생시켜야 한다. 세상의 벽은 의외로 낮았다. 한국문화는 이미 세계적 수준에 올라서 있다. 지역의 콘텐츠가 글로벌 맥락에 통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국내 다른 도시들과 협력과 협업도 진행하면서 적극적인 문화적 세계화에 시동을 걸어야 한다. 도시와 지역들 뿐 아니라 세계시장의 브랜드들과도 연계와 협력의 가능성을 열어가야 한다.‘다음포항’의 열쇠는 ‘포항문화’가 열어갔으면 한다. 포항이 만들어 보여주는 문화콘텐츠가 도시브랜딩의 새 길을 제시했으면 한다. 상상과 창의로 승부해야 한다. 문화가 살아야 지역이 살고, 지역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2-06-15

교육이 정치인가

장규열 한동대 교수 지방선거가 막을 내렸다. 사방이 고요해진 느낌. 돌아보는 이야기가 적지 않은 가운데, ‘교육감’도 그 한 자락이다.지역의 일꾼을 뽑는 정치적 이벤트에 교육을 따로 떼어 헤아리며 선택하는 일이 그리 자연스럽지 않았다. 정당 공천을 기반으로 부여되는 후보 번호도 제시되지 않아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불편도 감수했다. 특정후보의 이념성향과 정치적 연대를 가늠하며 표를 던지는 정치적 결정도 한몫을 했다. 후보 자신들도 그런 경향성을 드러내며 선거에 임하였다. 선거법을 범하지 않는 수준이었다지만, 정치적 색깔을 사뭇 과시하였다. 수다한 다른 정치적 선택과 함께 버무려진 선거판에서 다음세대를 기르는 교육의 진정성은 묻혀버리지 않았을까.교육이 정치인가. 교육감은 정치인일까. 결과 분석에 따르며, 보수와 진보 진영에서 교육감 자리를 거의 양분하였다고 한다. 어린이와 학생들이 사는 지역에 따라 받는 교육에 정치적 기운이 다르게 실리고 이념적 덧칠이 가해진다는 말인가.우리는 언제부터 교육을 정치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을까. 보수의 든든함과 진보의 역동성을 함께 가르치는 교육은 불가능한 것인가. 전통과 가치는 지키면서 상상력과 창의를 기르는 교육은 있을 수 없는가. 교육감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오른쪽과 왼쪽에 갇힌 편협한 품성을 기르겠다는 것인가. 그마저도 정치적 바람에 따라 때마다 다른 교육을 하겠다는 것일까. 의문과 질문이 꼬리를 문다. 국민의 직접 선택이 필요하다 해도, 정치권의 선거 이벤트와는 떼어내 선출했으면 어땠을까. 정치이벤트가 아닌 교육이벤트는 불가능했을까.교육은 무엇인가. 여러 과목도 가르치고 다양한 활동도 함께 하지만, 교육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선생님과 어른들이 다음세대의 마음밭에 하나씩 하나씩 채워넣는 게 아닐까. 그런 결과로 수북하게 채워진 모양새를 우리는 품성과 재능이라 부르는 게 아닐까.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소양도 물론 가르친다.하지만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는 폭넓은 가르침을 경험하게 하여, 생각의 틀이 넓어지고 상상의 창문에는 제한이 없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지식과 이념의 가르침을 다양하게 접하게 하고, 향후 정치적 결정은 개인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 물이 오르듯 자라야 할 아이들에게 오른쪽 왼쪽을 강요하는 가르침은 부적절하다. 보수와 진보를 표방하는 교육은 어른들 욕심에 포위된 속좁은 처사일 뿐이다.교육은 정치가 아니다. 정치를 가르친다 해도 정치적일 수는 없다. 진영보다 훨씬 넓은 세상을 가르쳐야 한다. 보수와 진보의 의미와 가르침을 모두 담아야 한다.교육은 폭넓게 담는 너른 그릇이어야 한다. 어느 쪽을 물어도 막힘이 없도록 넉넉하게 일러줘야 한다. 자신있게 선택하는 당당한 인성을 길러야 한다. 세상의 누구와도 서슴없이 어울리고 늠름하게 겨루도록 폭넓은 품성을 길러내야 한다.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은데, 이념에 갇힌 사람을 기른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다. 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2-06-08

선거, 이대로 좋을까

장규열 한동대 교수 대선, 총선, 그리고 지선. 선거, 선거, 그리고 선거. 민주주의의 꽃이라는데 국민의 마음은 어지러웠다. 막 지나간 전국동시지방선거. 동네의 일꾼을 뽑는 잔치여야 할 터에, 온 나라 행사가 돼 사방이 확성기 소음으로 시끄러웠다. 지역이 바뀌고 살림이 나아질 기대는 저만치 가고 후보 간 표 싸움만 그득하였다. 도지사와 교육감, 시장과 시의원, 군수와 군의원을 한꺼번에 뽑아야 하니, 보통사람 유권자 입장에선 누가 누구인지 알아차리기도 버거운 판. 무엇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 가늠도 하기 전에 표는 던져야 하니, 선거가 정말 시민과 지역을 위한 결과를 낳았는지 누구도 확인하기 어렵다.후보의 입장에서 보아도 정책이나 능력으로 승부하기 보다 인기몰이나 세를 과시하는 일이 최우선이었다. 새로운 일을 만들고 지역에 구체적인 변화를 앞당기며 마을과 동네에 미래비전을 세워야 했지만, 포퓰리즘과 표심몰이에만 집중하는 선거는 또다시 그렇고 그런 결과를 낳을 터이라 유권자는 선거에 특별한 기대를 걸지도 않았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기는커녕 제자리걸음만 반복하는 답습의 역사만 쌓을 뿐 아닌가. 우리는 언제까지 보고만 있어야 하는지. 확성기와 현수막, 허리인사와 악수세례로만 치르는 선거를 하염없이 거듭하는 선거판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 비전과 희망을 실은 정책이 만들어지고 토론과 홍보를 통해 겨루어지며 언론이 정상 작동하면서 확인되고 검증되는 진짜 민주주의는 실현할 길이 없겠는지.정책 입안의 과정을 조직적으로 관리하고, 홍보 전략의 진행이 체계적으로 정돈되며 언론 소통의 전달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일은 우리 민주주의에 불가능한 것일까. 정책은 지역의 현안을 치밀하게 분석한 결과로 토론과 조율을 거쳐 정교하게 만들어져야 한다. 홍보는 유권자의 생각과 의견을 반영하면서 진심을 담아 진행되어야 한다. 언론은 지역과 유권자의 현상을 가늠하고 후보자들의 정책을 비교하면서 균형있는 소통을 이끌어야 한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소란스럽고 현란하기만 할 뿐, 정책과 비전은 뒷전에 물리고 표심만 구걸하는 모습이 아닌가. 막걸리와 고무신이 판을 치던 그 옛적 선거와 무엇이 그리 다른지 알 길이 없다. 민주주의발전을 위한 미래동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정책, 홍보, 언론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전문교육기관이 필요하다.소란하였으나 알맹이는 없는 선거방식은 이제 막을 내려야 한다. 막대한 비용을 치르고도 구습만 반복하는 선출방식은 사회적 합의과정을 거쳐 반드시 수정하여야 한다. 21세기에 제자리걸음은 사실상 퇴보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민주주의의 허울을 쓰고 인기영합에만 집중하는 선거는 실패와 패착을 거듭할 뿐이다. 뽑아놓고 후회하는 습관이 어디서 왔을까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정책, 홍보, 언론이 선진화되지 않고는 선거가 제자리를 잡을 길이 없다.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발전하기 위하여도 정책, 홍보, 언론의 전문화가 시급하다. 오늘 선거는 우리가 바라는 결과를 빚고 있는가. 새로 뽑힌 일꾼들이 분발하길 바란다.

2022-06-01

교육과 폭력이 한 자리에 있다니!

장규열 한동대 교수 학교에는 늘 폭력이 넘실거렸다. 선후배 질서를 잡겠다는 선배들의 주먹은 공포 그 자체였다. 불량기로 가득한 폭력집단들이 학교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웠던 학교폭력이 넘실대는 가운데 학교는 언제나 위기의 연속이었다. 동급생이 폭력배가 되고 교실 안팎이 격투장이 되는 학교에서 온당한 교육은 불가능하였다. 폭력도 일상이려니 받아들이는 학교는 배움보다 공포로 가득하였다.그런 세상이 달라졌는가 했더니, 학교폭력은 아직도 위세를 부리며 우리 곁에 똬리를 튼다. 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디지털 세상에서 만나는 사이버폭력은 지능적인 강도가 오히려 높아 피해학생들의 고통이 극심하다. 정신적으로 가해지는 언어폭력과 집단광기가 춤을 추는 조직폭력마저 교육현장을 어지럽힌다.학교폭력은 당하는 피해자에게 평생을 두고 고통과 여파의 그늘을 남긴다. 가해자는 가맣게 잊어버린 기억을 피해자는 생생하게 간직하며 힘들게 지낸다. 충격과 억압의 경험은 남들을 향한 보복행태를 빚어 사회적 악영향으로 번지기도 한다. 장난으로 시작하여 거대폭력으로 이어졌던 도미노현상이 학교폭력에서 비롯되었다는 기사도 보지 않았던가. 피해자들의 건강한 일상을 회복하고 가해행태는 뿌리부터 막아내는 사회적 노력이 절실해 보인다. 학교다운 학교가 세워지기 위하여 학교폭력부터 제거해야 한다. 연예계와 체육계에 번지는 ‘학폭미투’는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학교폭력의 뼈저린 뒷모습을 보여준다. 수도권 문화계와 지역의 관련단체들이 ‘학교폭력방지를 위한 캠페인’에 나서기도 한다.피해자들과 가족들을 위로하고 회복을 돕는 이들이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를 만들었다. 지역에서 보다 적극적인 도움의 손길을 펼치기 위해 ‘포항경북센터’가 문을 연다고 한다. ‘우리아이행복프로젝트 지역센터’로 포항에 터를 잡아 학교폭력의 어두움을 거두어 내고 평화로운 학교를 가꾸어가도록 마음을 모은다. 지역의 대학생들로 구성한 ‘멘토들’이 피해학생들을 손수 만나서 함께 어려움을 걷어낸다. 가족들이 함께 겪는 답답함과 억울함은 유경험자 위로상담가들이 적극 위로하고 극복하도록 이끈다. 힐링가족캠프와 치유서비스를 제공하며 학교폭력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경계하고 빠르게 회복하도록 격려한다. 피해부모 커뮤니티도 조성하여 스스로 일어나는 노력을 지원한다. 교육부의 지원을 토대로 벌어지는 모든 서비스는 모두 무료로 진행된다.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지역 간 협력시스템마저 구축했다.아이들이 행복해야 한다. 학교가 평화로와야 한다. 교육에 폭력이 깃드는 순간, 모든 수고는 물거품이 된다. 배움이 가득할 학교에 억울한 짓눌림이 사라져야 한다. 이미 벌어진 폭력은 지체없이 제거되어야 한다. 입은 피해로부터 조속히 회복하도록 도와야 하고 함께 신음하는 가족들의 마음을 위로해야 한다. 지역에 센터가 설정되어 한결 기대를 높인다. 학교폭력이 사라지고 행복한 학교를 일으켜야 한다. 갈 길은 멀고 할 일은 많다. 폭력이 사라져야 학교가 산다.

2022-05-18

지성주의를 반기기로 한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목줄미착용을 엄금합니다’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이 더러 스치는 길목에 걸린 현수막이다. 애견에게 목줄을 반드시 착용시켜 달라는 호소였는데, 부정(否定) 표현을 거듭 보면서 잠시 헷갈리고 말았다. 그냥 ‘목줄을 꼭 맵시다’라고 했으면 금방 알아채지 않았을까.새 대통령이‘반지성주의’를 경계하며 민주주의의 위기를 지적했다.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는 누가 시작했을까. 지성을 반대하고 생각하기를 싫어하여, 사람들의 의견과 담론이 파묻힐 터에 과연 민주주의는 신음할 게 아닌가.그는 과연 그런 뜻으로 ‘반지성주의’를 이야기했을까. 역사학자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가 처음 썼다는 이 표현은 ‘집단이나 개인의 광기에 따라 정상적인 지적사고의 발현을 금기시하고 부정하는 태도’ 정도로 이해된다.반공사상을 기치로 1950년데 미국을 휩쓸었던 매카시즘(McCarthyism)과 독일의 히틀러가 선동을 거듭하며 반대세력을 악마로 지칭하며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던 반지성의 사례로 기억된다.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마오쩌둥(毛澤東)의 문화혁명도 독재와 전횡을 공고히 하고 집단의 논리로 다양한 사상의 발현을 억제한 사례가 아니었을까.오늘 우리들 생각의 텃밭은 어떠한가. 경제적 양극화가 심각하지만, 생각과 관점의 양극화는 위험한 수준을 이미 넘었다. 누구를 만나도 ‘당신은 어느 편인지’ 살피게 되고 내 편이 아니면 차단하고 돌아서는 게 일상이 되었다.디지털과 온라인은 내게 편안한 사람들만 친구로 삼는 습관을 더욱 굳히고 있다. 다른 생각에는 눈도 돌리지 않아 그들이 무엇 때문에 다르게 생각하는지 묻지도 않는다. 한 켠의 논리로만 판단하고 다른 편의 의견은 거들떠도 보지않는다.이런 사정을 잘 아는 정치권은 이를 극복하거나 수정하기 보다는 이용하면서 표대결로만 몰아간다. 양쪽을 함께 견주며 이성적인 판단에 이르러야 하는데, 정상적인 사고와 판단이 집단과 진영의 구호에 묻히고 만다.반지성주의는 극복함이 옳다. 켜켜이 쌓인 민중의 생각이 드러나야 하고 다양한 의견들이 담론의 장에 당당히 올라와야 한다. 토론과 주장이 맞서는 가운데 더 나은 지향점이 발굴되어야 하고 보통 사람들의 풀뿌리 정서가 존중되어야 한다.누구도 공론장을 휘어잡지 말아야 하고 공평무사한 시민민주주의가 구현되어야 한다. ‘반지성주의’를 고안했던 호프스태터 본인마저 정의상 애매한 용어임을 자인하였다고 한다. 부정이 부정을 낳는 혼돈의 연속을 경험했을 터이다. 민주주의를 실현함에 있어, 반지성주의를 부정하느라 씨름하기 보다 올바른 지성을 일깨우는 데 집중했으면 한다.더 넓게 보고 더 깊이 생각하는 대통령을 경험하고 싶다. 모두가 어울리며 더불어 행복한 나라를 만나고 싶다. 편을 가르면서는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반지성주의를 극복하기는 커녕 자칫 그 덫에 빠질 위험이 더욱 높다. 대통령도 국민도 상대에게 더 많이 관대해 졌으면 한다.

2022-05-11

내려가는 길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장규열한동대 교수 긴 터널이었다. 마스크와 함께 두 해를 훌쩍 넘겼다. 스산한 거리를 만나 소상공인들은 얼마나 힘들었는지. 학생이 사라진 강의실은 쓸쓸하였다. 손님이 없는 극장은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학교 운동장이 공터가 되었고 도시의 빌딩 숲까지 한산하였다. 일일 감염자 숫자에 때로 예민했지만,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19에 온 세상이 잠식당했다.이제는 끝이 보이는지 급격하게 숫자가 내려간다. 급격한 하락세에 코로나19는 감염병 등급마저 2급으로 강등되었다. 확연한 내림세를 의학계는 ‘안정적 감소세’라 부르고 팬데믹(Pandemic)이 엔데믹(Endemic)으로 바뀌어간다고 표현한다. 무서운 전염병이 아니라, 늘 존재하는 풍토병 정도로 보겠다 한다. 사회적 거리두기도 막을 내렸고 학교들이 전면 대면수업에 돌입하였다.기세가 꺾인 건 분명하지만, 끝나지는 않았다. 대한의사협회가 ‘코로나 종식이 아니며 마스크 착용의무조치를 해제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경고한다. 돌이켜 보면, 코로나가 시작되던 첫 해의 봄을 넘기며 한 차례 긴장이 느슨해 지기도 하였다. 스러진듯 하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하루에 몇만씩 신규감염이 발생한다.등산을 즐긴다면, 사고는 올라갈 때 보다 늘 내려오는 길에 만난다. 사회통계에 따르면, 교통사고도 하루 중 귀가 길에 더 많이 발생한다는 게 아닌가. 비행기는 이륙보다 착륙이 어렵다고 한다. 만날 때 보다 헤어질 때 좋게 마무리하는 게 어디 쉬운가. 제러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가 ‘총,균,쇠’에서 ‘질병이 인류의 문명에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빌게이츠(Bill Gates)가 수년 전부터 팬데믹의 도래를 예견했을 뿐 아니라, 코로나19 이후에도 유사한 바이러스의 습격이 인류를 덮칠 것을 경고한다. 생활 속에서 적정거리를 유지해야 하고 배려있는 소통과 교류에 익숙해야 한다.포스트코로나의 뉴노멀(New normal)을 다시 정리해 보아야 하며 새로운 환경과 질서를 만들어가야 한다. 디지털과 온라인 소통을 다시 들여다 보아야 하고, 소비문화와 레저환경도 바뀌어 가야 한다. 급격하게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듯한 환상은 버려야 하고, 차분하게 새로운 질서를 생각해야 한다. 경제를 다시 일으켜야 하지만, 급하게 모든 문을 열 수 있을지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빠져나가는 터널의 끄트머리에 또 어떤 복병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게 분명하다면 새롭게 만날 세상을 사려깊게 준비해야 한다. 방역과 의료체계, 소통과 협력의 양태, 국가와 시민사회의 역할, 사람 간 관계형성과 유지방식, 과학문명과 세계질서의 변화 등 헤아려야 할 과제가 차고 넘친다.이럴수록 차분히 신중하게 정비하여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반갑지만 찬찬히 헤아려야 한다. 흥분하여 옛 모습으로 달려가기 보다 차분하게 포스트코로나를 맞아야 한다. 어려웠던 시간을 함께 견뎌준 모두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마지막 언덕을 아름답게 넘었으면 한다.

2022-04-27

대선 뒷소감

장규열 한동대 교수 대선 이후 한 달이 흘렀다.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한 나라와 백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야 한다. 박빙의 힘든 싸움을 거쳤다 해도 결과를 확인한 국민은 새 리더십에 높은 기대를 건다. 이번엔 왠지 다르다. 당선 때 획득했던 지지율을 못 미치는 국정기대치가 잡힌다는 여론조사발표가 있다. 물러가는 대통령보다 당선인에게 거는 지지율이 낮다고도 한다. 대통령이 되기도 전에 민심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된다. 선거 직전 온 국민의 마음을 졸였던 동해안 산불로 피해를 본 주민들을 당선인은 잊었을까. 지켜온 한반도의 평화는 없어도 그만일까 의아해진다. 지난 정권들이 쌓아온 선진국의 국격은 생각이나 하는가.대통령집무실 이전이 민생의 어려움에 밀려난 모양새가 아닌가. 돌려받겠다 요청한 국민이 주변엔 안 보이는데 굳이 취임식 이전에 청와대를 개방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정치보복은 없다더니 진정인가 묻고 싶다. 당사자도 아닌 딸과 어미가 빠진 질곡과 멍에는 못난 대학들만 탓해야 하는가. 일본을 대하는 태도에는 분명한 매듭이 없다. 일본이 한국민들에게 가했던 상흔과 씁쓸함은 ‘파친코(Pachinko)’가 소설과 드라마로 담담하게 들려주고 있다. 일본교과서의 부당한 기술 앞에 무엇 때문에 ‘입장표명이 부적절’하였을까. 지난 정부도 소홀하여 국민이 힘들었던 ‘교육’은 아예 돌아보는 이가 보이지 않는다. 교육은 백년대계인가, 아니면 무려 부처폐지를 고려할 애물단지인가. 당선인과 인수위의 집행기준은 ‘민심과 미래’인가 아니면 당신들만의 정권탈취 축하행진인가.당선인은 선택해 준 국민들에게 겸허해야 한다. 박빙의 차이 0.7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1963년 대선에서 박정희가 윤보선을 면도날 박빙 15만표 차이로 이겼던 기억을 되살려야 한다. 승자독식이라지만, 통합과 협치를 내세운 자신의 지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오만과 독선으로 유신에 이르러 불행한 마감을 초래했던 역사를 돌아보아야 한다. 지지했던 국민과 함께 지지하지 않았던 표심도 돌아보는 지도자가 되었으면 한다.끝을 모르고 벌어지는 반목과 격차는 사회문화적으로도 건강하지 못하다. 나라와 국민의 분열을 걱정하였던 미국 부시 대통령이 ‘보다 친절하고 부드러운 나라(Kinder and gentler nation)’를 구현했으면 싶다. 역량과 슬기의 한민족이 품격과 관용까지 갖춘다면 손색없는 선진국이 되지 않을까.대통령이 앞장서야 한다. 나라의 격과 국민의 마음은 앞에 선 리더가 하기에 달렸다. 국민은 당신의 말을 믿고 따르는 게 아니라 당신이 실천하는 바를 보고 겪으며 마음을 결정할 터이다. 성패의 여부는 리더를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 마음의 향배에 달려있다. 그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거꾸로, 지지하던 사람들이 그에게서 멀어진다면 경고등은 이미 들어온 게 아닌가. 나라의 미래와 국민의 살림을 국정의 기준으로 삼는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리더가 잘해야 나라가 살고, 국민이 깨어야 미래가 밝다.

2022-04-06

할리우드가 던진 두 가닥 생각거리

장규열 한동대 교수 장애인인권, 특별히 교통이동권이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교통약자들이 겪는 불편함을 참다못한 인권단체들이 행동에 나섰다. 시위방식에 대하여 논란이 뜨겁다. 시민에게 불편을 끼치는 행태는 공익에 반할 뿐 아니라 사회 일반에 불편을 끼치므로 멈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한편, 해묵은 인권문제에 사회적 인식을 제고하고 장애인들의 기본적인 교통인권을 확보하기 위함이므로 정당하다는 주장도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 일방의 의견에 편을 드는 표현이 있어 갈등은 증폭되었다. 집회와 시위가 합법적인 테두리를 어디까지 지켜야 하는지 생각거리를 던지기도 하였다. 선진국 문턱에 섰다면서도 기본적인 장애인 교통인권에 사회적 배려와 구체적 설비가 부족한 우리의 모습이 부끄럽지 않은가.올해도 할리우드의 아카데미시상식은 여러 가닥에서 세계인의 관심을 모았다. 영화 ‘CODA(Child of Deaf Adults·듣지 못하는 어른들의 아이)’가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가족 구성원들 가운데 단 한 사람 ‘듣고 말할 수 있는’ 소녀는 사랑하는 가족을 보살펴야 하는 처지와 음악적 재능을 키워가고 싶은 꿈 사이에서 일상을 이어가며 갈등을 겪는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가운데 겪는 어려움과 평범함이 자연스럽게 영상을 채운다. 무엇보다 그런 모습을 담은 영화가 최고의 영화로 선정되었다. 장애인들을 보통사람으로 이해하고 ‘우리들’ 가운데 품고자 하는 사회적 배려와 공감, 태도와 노력이 부럽다. 우리는 언제쯤 그런 열린 마음을 허용하는 사회로 진화할 수 있을까. 그들의 불편을 공감하면서, 함께 이겨내고 제거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해야 할 터이다.폭력은 가라. 유명배우 윌 스미스가 사고를 쳤다. 시상후보자들을 소개하는 가운데 사회자의 표현에 격분한 그가 단상으로 올라가 주먹질을 하였다. 전세계의 눈길을 모으며 TV중계 중에 그가 날린 귀싸대기는 충격적일 수 밖에 없다. 그는 시상식의 뒷부분에 남우주연상까지 거머쥐며 화려한 무대에 연이어 등장하였다. 사회자가 던진 농담이 아내의 심기를 힘들게 하였음도 이해하였다. 그래도 그의 폭력은 도를 넘었다. 입은 상처를 오로지 폭력으로만 갚아야 한다면 일상의 주변은 모조리 정글로 변하지 않을까. 정신적 아픔을 물리적 힘으로만 이겨내야 한다면 윤리와 도덕은 설 자리를 잃는다. 말로 입은 상흔을 주먹으로 지우려 했던 그는 관객의 신뢰를 잃었을 것이며 사회는 폭력의 위험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가 날린 폭력은 시청자들의 건강한 판단에 따른 심판에 직면할 것이고 공적인 결정에 따라 적절한 징계에 이르러야 한다.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교육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나와 다른 조건들을 가지고 날마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시선이 보다 따뜻해 져야 한다. 갈등과 분열, 상처와 혼돈을 극복하는 방법들이 많지만, 폭력은 그 가운데 설 자리가 없다. 미움과 차별, 혐오와 폭력으로는 그 무엇도 해결할 수 없다. 오늘도 할리우드는 세상을 향하여 무엇인가 던진다.

2022-03-30

교육, 백척간두에 서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대통령이 새로 뽑혔지만, 여전히 시끄럽다. 건강한 내일을 향한 토론과 담론으로 북적거렸으면 하는데, 현실은 전혀 딴판이다. 정치과몰입 현상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난데없이 청와대 이전이 논란거리가 아닌가. 상상과 창의로 비전이 나누어지고 미래를 겨냥하는 지향성이 선명했으면 하는데, 날마다 들리는 소리는 전혀 비생산적인 아귀다툼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6월이면 동네마다 새로운 일꾼들을 선출해야 하는데, 나라는 온통 하릴없는 말싸움과 신경전에 빠져있으니 국민에게 희망은 언제 안겨주려는지.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전국에서 열일곱 교육감들도 새롭게 선출한다. 유치원과 어린이집, 초중등과 대학교육은 나라의 미래가치를 오늘 기른다는 의미만으로도 중차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교육감선거에 나서는 후보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판에 우리 교육이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구도 진정성을 실어 고뇌하지 않는 우리의 교육은 어쩌다 이런 모양이 되었을까. 대통령인수위원회 조차 인사에서 교육계를 패싱하였다 하여, 교육부를 다른 부처와 통합하거나 심지어 폐지할 것이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현 정부의 실책 가운데 백년대계 교육에 대하여 분명한 철학과 미래지향을 바르게 세우지 못한 점은 뼈아픈 부분이다.다음 정부에도 희망적인 기대가 걸리지 않는 것은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면 심대하게 우려되는 바이다. 심지어, 국정쇄신의 증거로 교육부폐지카드를 건다는 예측은 ‘다음세대’를 위하여 불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교육은 어디로 가는가.미국의 흑인민권운동가 말콤엑스(Malcolm X)는 급진적인 사회운동을 하였지만, ‘교육은 미래로 가는 여권과 같다. 왜냐하면, 내일은 교육으로만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산적한 교육 관련 현안들 앞에 교육철학도 분명히 수립하지 못한 채, 업무를 이리저리 분산하거나 해체하는 모습은 자라나는 새싹들을 가벼이 생각하고 홀대하는 게 아니면 무엇인가.새 정부의 교육홀대가 교육 전면에 대한 외면으로 이어지면 국가의 미래는 수렁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초중등 교육도 문제지만, 켜켜이 쌓여온 대학입시제도와 대학교육실태의 문제들은 어찌 되는가. 미래지평을 향한 전반적인 담론이 태부족인 오늘, 교육마저 뒷전으로 물려진다면 ‘내일을 위한 준비’는 누가 하는가. 공교육의 효능을 높이고 시급한 교육이슈들을 중심을 잡으며 다루기 위하여 교육부는 반드시 존치해야 한다.교육이 백척간두에 섰지만, 누구도 신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는 가운데 혹여라도 부정과 비리가 교육계에 스며들면 나라의 뿌리마저 흔들릴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이제라도 생각을 돌이켜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헤아려야 한다. 나라의 백년대계를 무겁게 여긴다는 상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교육부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미국작가 부스캘리아(Leo Buscaglia)는 ‘변화야말로, 모든 배움의 결과물’이라고 하였다. 평생 배워도 다하지 못할 교육에 나라의 마음이 실려야 한다.

2022-03-23

갓 퍼 올린 물동이처럼

장규열 한동대 교수 미생물학자이며 의사인 소크(Jonas Salk) 박사의 생각을 다시 새긴다. ‘50년 후 벌레들이 없어진다면 지구는 멸망할 것이지만, 사람들이 사라진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 될 것이다’지구와 환경을 혼탁하게 만들어 지구가 망가지는 건 둘째 치고라도, 인간들은 서로를 헐뜯는 자중지란 끝에 공동체성이 무너진다는 경고가 아닌가. 그러니, 아름다운 지구를 회복하려면 인간보다 벌레들이 융성하는 게 낫겠다는 충언이 아닌가.대선이 막을 내렸다. 열심히 다투었다. 서로 흠집과 상처를 드러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가. 등지고 돌아서는 일이 그간의 일상이었다. 이제는 돌아보고 보듬는 열심을 내어야 한다.‘치열하게 싸웠지만 우리는 모두 한 팀이 아니었느냐’며 국민들을 다독였던 미국의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을 기억한다. 민주주의의 작동방식 가운데 선거가 꽃인 까닭은, 선거가 있어 힘을 가진 이들을 주기적으로 비판하고 평가하며 공동체의 나갈 방향을 다시 헤아려보는 데 있지 않을까.돌아보면 부작용도 있고 가짜뉴스와 마타도어도 없지 않았지만 길게 보아 선거가 있어 우리는 늘 새로움을 경험하는 셈이다. 우물에서 갓 퍼올린 물동이처럼 새 정부를 우리는 한마음으로 반겨야 한다. 우리는 어차피 한 팀이었으니까.프랑스의 정치철학자 루소(J.J.Rouseau)는 사람들이 겪는 선거의 경험에 관하여 ‘사람들이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대단한 착각이다. 그건 선거기간 뿐이다. 선거가 끝나는 순간, 모두 다시 노예가 되어버린다’고 경고하였다.5년을 맡겼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관찰하고 감시해야 한다. 그가 우리에게 던졌던 약속들이 기대만큼 지켜지는지, 그들이 우리에게 다짐하였던 회복과 화합이 실천되는지, 나라의 청년들과 지역에도 꿈과 희망이 이루어지는지 지켜보아야 한다. 그늘지고 어두운 구석이 이제는 사라지고 새 힘이 온 나라에 솟아나는지 살펴야 한다.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나라의 기운이 꺾일라 치면, 언제라도 매서운 채찍을 가할 수 있도록 국민이 깨어있어야 한다. 민주주의가 국민에게 보장하는 ‘견제와 균형’을 끌어 올려야 한다.언어학자 촘스키(Noam Chomsky)는 ‘지성인들은 권력의 이해에만 복무하는 사람들’이라고 비꼬았다. 자신의 이익에만 몰두하며 사회적 부조리에 침묵하는 이기적 행태를 꼬집은 게 아닌가. 변화와 혁신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목소리를 내고 지속적으로 제언하는 시민의식이 필요하다는 요청으로 들린다.학벌과 지연, 차별과 격차, 혐오와 차단으로 숨이 턱턱 막히는 사회적 지평은 집단적 자폐현상을 부르고 있다. 대통령과 새 정부는 나라와 국민의 선 자리를 분명히 보고 화합과 회복의 길을 찾아야 한다. 세월이 가면 나아져야 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수렁에 처박히는 느낌이 아닌가. 치열했던 동서냉전의 막바지에 미국 대통령 부시(George Bush)는 ‘보다 친절하고 부드러운 나라’가 되자고 당부하였다. 상처투성이로 남는 게 없기보다, 아픔을 딛고라도 국민의 위대함을 증명할 때다.

2022-03-10

세상을 품고 내일을 생각하며 폭넓게 담으라

장규열 한동대 교수 새 대통령을 만나기 일주일 전. 걱정과 긴장, 기대와 흥분이 오가는 마지막 몇 날. 나라와 국민은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습관이 되어버린 코로나와 새롭게 마음을 어지럽히는 우크라이나. 정권교체와 정치교체, 혐오정치와 비전제시 가운데 국민은 하루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지지하는 이들이 몰려다니고 서로 간에 진영을 넘어서는 지지선언들이 들려오면서 선거판은 혼란스럽다. 주권재민이라지만, 표심으로 승부를 결정할 날들이 며칠 남지 않았다. 마지막 날들을 지혜롭게 사용하려면, 유권자는 무엇을 살펴야 하는지. 구호와 주장이 정치적 관심사라면, 정말로 중요한 것들이 모두 담겼을까. 찬찬히 숨고르며 헤아려보자. 나라의 내일과 모두의 일상에 진정으로 필요한 가닥을 빠뜨리지는 않았을까.글로벌마인드(Global mind). 국제통상과 외교정책은 누가 돌아보는가. 반도국가의 미래운명은 이해당사국 간의 관계조정에 달렸을 터에 특정 국가에만 의존하는 습관을 언제 벗어나려는지. 관계망의 폭도 넓히고 깊이도 다뤄야 하는데, 누구도 소상한 계획을 말하지 않는다. 디지털과 온라인으로 국경의 의미도 흐려지는 세상에 국민도 이제는 더 넓은 세상을 만나야 하는데, 담론과 토론은 우물 안 개구리에 머물고 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은데 좁다란 한반도에 갇힌 정신세계는 어떻게 탈피할 것인가.다음세대(Next generation). 말재주와 사탕발림으로 20·30을 회유하려는 정치는 그 자체가 구태스럽다. 긴 안목으로 백년대계를 꾸려야한다. 다음세대에게 어떤 나라를 물려줄 것인지, 그들과는 무엇을 나누어야 하는지, 어떤 교육으로 가르치고 배울 것인지. 철학과 나침반이 보이지 않는 교육이 진짜 문제가 아닌가. 오늘을 퍼먹이기에 급급한 공부로는 든든한 내일을 준비하지 못한다. 다음세대는 다음시대에 어울릴 공부로 만나야 한다. 학령인구 동태는 심상치 않은데 대책없이 옛 모습을 답습하는 대학과 입시제도는 언제 손볼 것인가. 오늘만 겨우 담는 교육정책으로는 다음세대를 기를 수 없다.다문화(Multiculturalism). 급격하게 바뀌는 우리의 모습 가운데 무시할 수 없는 부분, 다문화인구. 그들에겐 표가 없어 정책적인 영향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우리 전체인구의 2.7%를 차지하며, 전체 출생아수 대비 6.0%, 학교 내 전체 학생대비 3.0%에 이르고 있다. 개념적으로도 인구 5%를 넘으면 ‘다문화사회’라고 부른다는데, 그럴 날도 머지않았다. 사회적, 교육적, 문화적으로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나라의 얼굴과 습관이 새로운 배경과 환경에 어떻게 어울려야 하는지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풍성하고 다양한 문화를 담고 만들어낼 그릇을 마련해야 한다.디지털과 온라인에 더하여 글로벌, 넥스트와 멀티환경에 너끈하게 어울릴 이 땅이 되어야 한다. 대선이 그만한 역량을 불러올 수 있을지 의문이다. 편가르기 표싸움에만 몰두한 정치는 미래를 당당하게 열어야 하는 나라와 국민에게 턱없이 부족하다. 넓게 바라보고 내일을 생각하며 다양하게 품는 리더를 기다린다.

2022-03-02

후보 당신에게 그리고 국민들에게

장규열 한동대 교수 딱 2주 앞이다. 대통령이 새로 뽑힐 날이 코 앞인 게다. 국민들의 마음은 어떨까.대선 다음이 더 걱정이라는 목소리도 있다. 기대와 희망보다는 좌절과 낙심이 한가득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내일이 보이지 않는다는 자조는 무엇 때문일까.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 보이지 않는 건 왜 그러는 것일까. 어제를 딛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려고 대선을 치르는 게 아닌가. 무엇 때문에 우리는 오늘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가. 누구를 뽑아도 하나같이 절망이라면 굳이 대선은 왜 있어야 하는가. 나라와 국민은 어쩌다 오늘처럼 첨예하게 나뉘었을까. 마음들이 어떻게 이만큼이나 쪼개어졌을까. 어찌하면 우리는 다시 소박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까. 이미 불가능한 게 아닐까. 너무 멀리 와 버린 건 아닐까.디지털세상이 도래하고 미디어환경이 바뀌면서 우리는 각자 자기만의 동굴 속에 갇혀버렸다. 온라인과 SNS는 마음에 드는 생각만 늘어놓는 매체만 선택적으로 구독하게 한다. 정치적 경향성이 다르거나 이념향배가 다른 담론에는 등을 돌린다.다른 생각과 다른 의견에는 끝없이 돌을 던지는 세상. 나누고 견주는 일에는 인색한 관계. 경청과 포용은 생각도 못하는 사람들. 당신은 어느 편이냐고 끊임없이 살피는 만남. 우리 편에게는 한없이 너른 가슴, 다른 편에게는 끝없이 야박한 외침. 메시지(message) 내용보다 메신저(messenger) 사람으로 칼날같이 쪼개지는 태도. 편가르고 짝지으면서 대선판이 흘러간다. 구호와 성토로만 얼룩진 세상에 차분하게 들어보는 아량은 기대할 수가 없다. 마지막 며칠 동안 우리는 무엇을 살펴야 하나.정직. 뜬금없을까. 꼬리를 물며 드러나는 거짓말들 가운데 정직함을 찾으라는 게 말이나 되나. 적개심을 내려놓고 찬찬히 살피면 진심이 보인다. 나라의 내일과 국민의 일상을 누가 진정으로 담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걸어온 길과 나서는 태도를 살피면 그의 진실이 그래도 보인다. 조금씩 부족한 내 모습만 생각해도 후보의 흠결 가운데 진정성이 드러난다. 상처와 실수를 넘는 비전과 계획을 찾아야 한다. 어려움을 넘으려는 용기와 실천력을 살펴야 한다.정치인은 누구보다 정직해야 한다. 공인은 진지함과 진솔함으로 나서야 한다. 해결해야 할 일들의 무게만큼 후보의 언행에는 진중함이 실려야 한다. 비전이 두터워야 하고 계획이 분명해야 한다. 피상적인 구호로는 세상과 시대의 높은 파도를 넘을 수 없다.어차피 51대 49라는 생각부터 위험하다. 결판은 그리 날지라도 대선후보가 국민의 화합을 이끌지 못한다면 나라는 다시 어려움을 만날 터이다. 겨레의 위대함과 나라의 선진성이 드러나려면 통합의 의지를 살려야 한다. 민생이 살아나고 경제가 일어서려면 이념의 벽을 넘어 어떤 선택이 좋을까. 어려움을 딛고 기회의 창을 열어가려면 우리는 무엇을 택할 것인가. 대선의 표심을 간직한 유권자 국민은 후보들의 진지함과 정직함을 기대한다.얄팍한 구호로 혹 오늘 속인다면, 그 거짓은 선거 후에라도 반드시 드러난다. 대선에 높은 기대를 건다.

2022-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