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박경리 작가 탄생 100주년이다. 그를 기리는 나만의 방식으로 예전에 읽었던 ‘토지’ 전권을 매일 한 권씩 다시 읽었다. ‘토지’는 약 26년간의 집필 기간을 거친 대하소설이지만 나에게 먼저 다가온 것은 분량보다 등장인물들의 숨결이었다. 민중의 삶들이 흙처럼 겹겹이 쌓여 하나의 역사를 이룬 듯했다.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나는 환경에 흔들리면서도 유장하게 삶을 이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조선인들의 생활사가 자세히 묘사된 책을 읽고 났더니 문득 국립대구박물관에 가고 싶어졌다. 주말에 일정을 조율해 대구박물관에 다녀왔다. 박물관은 언제나 시간을 잠시 멈춰 세우는 공간이다. 그중에서도 복식문화실은 유독 내 발걸음을 늦추게 했다. 복식의 변천사는 의복이 몸을 감싸는 방식이 아니라 삶을 감당하는 자세의 변화처럼 보였다. 시대가 바뀔수록 옷은 가벼워졌지만 그 옷을 입고 살아낸 시간의 무게는 줄어들지 않았으리라. 그곳에서 오래 시선을 붙잡은 것은 흑립이었다. 흑립은 유리 진열장 안에서 완벽하게 고요했으며 근엄했다. 말총의 촘촘한 결, 둥근 테의 균형, 빛을 삼키는 듯한 짙은 검정은 하나의 완성된 형식이었다. ‘국가무형문화재 갓일 기능보유자 입자장 박창영’ 장인의 손에서 태어났다는 설명문 옆에서 갓은 기능과 미학의 정점으로 존재했다. 갓은 일상의 쓰임에서 벗어나 보존의 대상으로 변모하더니 어느덧 현재의 테두리 바깥에 놓여 과거의 물건이 된지 오래된 듯 보였다. 그러나 흑립을 바라보는 내 시선은 자꾸만 다른 갓과 겹쳐졌다. 유리 너머에서 정적(靜的)으로 존재하는 갓이 아니라, 바람과 햇빛을 맞으며 동적(動的)으로 살아있던 작은외할아버지의 갓이었다. 그분은 집성촌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던 훈장님으로 명절이면 한복을 차려입고 상투를 틀어 올려 갓을 쓴 채 마을길로 나섰다. 그 시절 나는 할아버지의 갓을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명절이면 으레 보았던 풍경이었고 자연스러운 차림이었다. 그러나 박물관의 흑립 앞에 서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갓은 머리 위에 얹는 단순한 의미의 사물이 아니라 스스로를 다스리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긴 수염을 훑으며 에헴 헛기침을 하던 순간 속에서 갓은 겉치장이 아니라 태도였다. 집안 어른들을 찾아뵙고 예의범절을 다하는 몸가짐이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 아무에게나 고개를 함부로 숙이지 않게 하고 세상사에 쉽게 타협하지 않게 만드는 신념과 자존감이 갓 속에 담겨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대구박물관을 나서며 다시 한 번 흑립을 떠올렸다. 복실문화실의 흑립은 더 이상 쓰이지 않는 물건이 되었지만 작은외할아버지의 갓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서 거풍되고 있었다. 박물관의 유물은 과거에 머물러 있었고 기억 속의 갓은 현재의 내 마음 안에서 살아 움직였다. 그 차이가 박물관에서 나를 한참 동안이나 서성이게 했다. 결국 삶이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머리 위에 얹고 하루하루를 견디는 일임에랴. 생활의 속도, 시간의 효율, 타인과 주고받는 언어 또한 수시로 내 머리 위에 얹어지는 것들이다. 지금도 흑립의 이미지가 나를 떠나지 않고 여전히 머물러 있다. 글·사진/정미영 수필가
2026-02-11
지난해 가을, 수필집을 발간했다. 신문과 여러 매체에 흩어져 있던 글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새로운 숨을 얻었다. 어떤 글은 오래 묵은 슬픔에서 왔고 어떤 글은 지나가는 바람 같은 기쁨에서 태어난 글이었다. 책 속의 모든 글이 내 마음을 다독여 주었듯이 독자들에게도 은은한 치유의 서막이 되기를 바랐다. 12월 초입에 북콘서트를 했다. 한 독자가 내게 “다가오는 크리스마스까지 잘 키우세요”라는 말과 함께 포인세티아 화분을 안겨 주었다. 포인세티아는 초록색과 붉은색이 조화를 이루기에 크리스마스 꽃이라 불리며 꽃말은 축복과 행복이다. 갓 태어난 책을 축복하듯 눈부신 생명의 빛을 품고 있어 자태가 황홀했다. 나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것처럼 온종일 행복했다. 집으로 돌아와 거실에 화분을 두었다. 전등을 켜자 붉은 잎이 실내의 공기를 따뜻하게 물들였다. 풍성한 초록 잎에 둘러싸인 포인세티아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우리가 꽃이라 부르는 붉은 부분은 진짜 꽃이 아니다. 포엽(苞葉)이다. 꽃을 감싸고 보호하기 위해 태어난 잎. 가운데 작고 노란 꽃은 조용히 숨어 있었고, 포엽은 자신이 꽃인 듯 화려하게 빛나며 세상의 시선을 대신 받아주고 있었다. 포엽은 스스로를 꽃처럼 드러낸다. 하지만 사실은 꽃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잎이다. 그 희생과 배려가 없다면 진짜 꽃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문득 세상 만물의 이치가 그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무대 위에 서고 누군가는 무대 뒤에서 조명을 켠다. 누군가는 이름을 남기고 누군가는 이름 없이 지탱한다. 드러내지 않고 타인을 도와주는 돌봄의 손길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뒷자리에서 묵묵히 자기 소임을 다하는 이웃들이 있어 우리 사회는 아직 희망이 있다. 내 삶에도 포엽 같은 존재가 있다. 수필 동인과 독서회, 글쓰기 모임을 함께하는 분들이다. 혼자 책을 읽고 혼자 글을 쓰는 행위는 개인의 내면을 단단하게 하지만, 여럿이 참여하는 책 읽기와 글쓰기는 타인의 관점을 들여다보며 내 사고를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내 독서도 마찬가지다. 혼자서 책 읽기를 마칠 때도 있지만 토론을 통해 사고의 전환을 경험할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만나는 분들은 서로의 성장을 위해 아낌없이 이끌어 주고 토닥여 주는 포엽이다. 포엽은 화려하지만 오래 머물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서서히 빛을 잃고 이내 시든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꽃은 열매를 맺어 다음 계절을 준비한다. 포엽의 겉모습이 사라진 뒤에도 열매라는 본질은 남는다. 그래서 나는 한때 찬란히 빛났던 순간보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참고 견뎠던 순간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포엽은 말이 없다. 하지만 자기 역할을 알고 있다. 앞에 나서지 않아도 없으면 안 되는 존재. 꽃을 위해 자기 색을 태우는 잎이다. 그 겸허한 구조를 바라보며 나는 오래 잊고 지내던 마음 하나를 다시 기억해냈다. 빛나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드러나는 것이 진짜가 아닐 수 있다는 진실이다. 나는 지금 포인세티아를 바라본다. 포엽 사이에서 작은 꽃이 살포시 숨을 쉬고 있다. 포인세티아는 나에게 은유 하나를 조용히 건넨다. 내 삶이 빛나고 싶다면누군가를 감싸 안는 법을 먼저 배우라고. /정미영 수필가
2026-01-28
새해 첫날, 겨울바다를 찾는다. 해는 수평선 앞에서 아직 보이지 않는다. 바다가 밤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중인지 사위가 검푸른 탓에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아득하다. 차가운 바람이 모질게 불어와도 돋을볕에 둘러싸인 해를 보겠다는 설렘으로 잠연히 기다린다. 해는 얼굴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돌아서지 않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드넓은 하늘을 배경으로 해가 입체적으로 떠오를 것이라는 믿음 하나만으로 서 있다. 돌이켜보면 새해 첫 해돋이는 항상 기다림으로 시작되었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끝내 도착할 빛을 믿으며 서 있어야 하는 순간이 우리네 인생과 닮았다. 나는 프리랜서 강사다. 회사라는 일정한 틀도, 조직도 없이, 오롯이 내 능력과 운에 기대어 하루를 엮는다.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았기에 강의가 없어지면 생활의 뿌리가 하릴없이 흔들린다. 직장이라는 굳건한 땅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살았다면지금과는 다른 리듬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얼마 전, 오랫동안 맡아온 강의를 그만두었다. 내 마음이 무게중심을 잃고 요동쳤다. 그 수업은 단지 수입원일 뿐만 아니라 나를 지탱해 주던 일상의 한 줄기였다. 쉽사리 꺾이지 않을 줄 알았던줄기가 뚝 끊기자 마음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무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자책이 들었다. 햇살은 고요했으나 내 안의 그늘은 작은 먼지에도 일렁였고, 바람 하나 없는 날의 갈대처럼 사소한 일에도 속절없이 흔들렸다. 내가 현재 나아가는 삶의 방향이 올바른지, 무시로 나를 향해질문을 던졌다. 마음속에서 감정의 파고가 높고 거셌다. 그러는 사이에나는 내 안의 생기를 조금씩 지워갔다. 그렇게 한동안을 앓고 나서야 문득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어둠 속에서 자책의 울타리를 키우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새로운 강의를 맡게 될 날을 기다리자고 마음먹었다. 내 삶의 많은 순간이 해가 뜨기 전의 새벽과 닮았다. 애써 나아가고는 있지만 정말로 빛이 있는지 알 수 없는 날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간단없이 갈망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언젠가는 해가 떠오를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것은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장마 뒤에는 하늘이 갠다는 자연의 섭리를 들먹이는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진중한 믿음이었다. 해가 뜨기 전의 시간은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나는 지금 해돋이를 보기 위한 기다림의 층위를 체감한다. 밤새워 기다린 사람과 이제 막 도착한 사람 사이의 기다림이 뒤섞이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다. 모두가 같은 방향을 보고 있지만 각자 안고 온 사연은 다르다. 어떤 이는 잃어버린 시간을, 어떤 이는 아직 오직 않는 용기를 스스로 다독이며, 또 다른 이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마음 하나를 품고 저마다의 자리에 묵묵히 서 있다. 드디어 해가 장엄한 모습으로 떠오른다. 누군가는 감탄하며 박수를 치고 누군가는 두 손을 모으며 기도한다. 해가 보이지 않아도 믿음으로 기다렸더니 감동의 여운이 짙다. 나는 해돋이를 기다리는 동안에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 해는 사람들의 믿음으로 떠오른다. /글·사진=정미영 수필가
2026-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