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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명활성

이용선기자
등록일 2009-04-17 21:15 게재일 200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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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활성(明活城)은 경주 보문단지 입구 삼거리에서 우측 순환도로를 타고 300m 정도를 진행하면 명활산성 이정표가 보이고 우측으로 진입로가 있다. 진입로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북벽이 보이는데 이곳에서 답사를 시작하면 된다.

명활성은 보문단지 서쪽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앞서 말한 보문단지 순환도로 우측으로 낮은 산이 도로를 따라 이어지는데 그 야산이 명활성이라 생각하면 된다. 산성은 252m의 북쪽 봉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약 4.5km의 포곡식 석성(내부에 넓은 계곡을 포용하고 계곡을 둘러싼 주위의 산 능선을 따라 성벽을 축조한 산성)과 269m의 남쪽 봉우리를 감싼 토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석성만 사적 제47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육촌(六村) 중의 하나인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의 촌장이고 배씨(裵氏)의 시조인 지타공(祗陀公)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다. 동해에서 침입하는 왜병에 대비하는 중요한 위치인 까닭에 일찍부터 산성이 축조되었고, 왜병과 자주 격전을 벌인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남아 있다.

명활성은 왕경의 동쪽을 방어하는 최일선의 성곽으로써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신라 실성왕 4년(405)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그 이전에 만들어진 성임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에 남아있는 명활성은 명활성작성비의 발견으로 밝혀진 551년 이전의 토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명활성은 왕경의 도시계획으로 인해 재정비되던 시기인 5세기 말에는 궁성(宮城)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명활성의 석성은 25∼55cm×20∼45cm 크기의 화강암 석재를 가공한 것인데, 남산신성과 같이 정연하지는 않으나 대충 단을 이루면서 내외면을 쌓고, 안쪽 속 채움은 토사가 전혀 없는 잡석만을 이용하여 구축하였다. 그리고 성벽의 내측에는 폭, 약 4m 내외의 통로를 두었다.

명활성의 체성(體城)은 협축(夾築)에 의한 축조기법으로 쌓았으며, 장방형의 깬 돌을 이용하여 바깥 면을 잘 맞추어 거의 수직에 가깝게 바른 층 쌓기로 축조하였고, 벽석(壁石)사이에 생긴 틈에는 쇄기돌과 점토를 채워 마무리하였다. 깬 돌 사이의 틈에 쇄기돌을 박은 것은 수평을 조정하는 목적과 틈을 메우는 두 가지 이유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성곽의 높이는 약 9m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내에는 문지(門地) 7개소, 수문지(水問地) 4개소가 있고 건물지 6개소가 있는데, 성벽이 붕괴하면서 덮이거나 파손되어 원형을 알 수 있는 곳이 없다. 1988년 8월의 홍수로 명활성 북벽의 일부가 붕괴하였는데, 그곳에서 명활성작성비(明活城作城碑)가 발견되었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66.8cm, 하부 너비 31cm, 최대 두께 16.5cm이다. 비문은 전면의 상부 2.5cm 정도의 공간을 두고, 하부에는 비석을 묻을 수 있도록 20cm 정도로 남겨 놓았으며, 그 나머지는 빈틈없이 꽉 차도록 새겼다.

명문은 총 148자를 새겼는데, 필획(筆劃)이 깊어서 글자가 명확하다. 명문의 새김방법은 예리한 정으로 글자 형태를 쪼은 다음, 송곳처럼 뾰족한 연장으로 2∼3회 문질러 필획을 다듬었다. 글자는 1.5∼2.5cm 크기로 일정하지 않다. 비문의 내용은 작성 간지가 있는 서두, 축성공사 및 책임자의 인명, 축성 공사 실무자의 인명 및 담당 거리, 공사 담당 위치, 작성 참가자의 수, 공사기간, 글쓴이의 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첫 머리의 ‘신미년(辛未年)’이라는 간지로 보아 551년(진흥왕 12년)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축성시에 비석을 세우는 것은 책임 한계를 명백히 하고 축성에 참가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신라영역에서 이러한 축성비가 발견된 것은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가 여러 개 있으나 명활산성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 비가 발견됨으로써 신라 중고기의 인력 동원 체제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즉, 이 비석과 성격이 같은 남산신성비에는 1개 비석에 1개 집단만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비에는 1개 집단 안에 3개의 소분단으로 편재되어 있는 점 등이다.

또 이 비석에는 축성에 소요된 공사기간이 35일로 기록되어 있어서 1개 성곽 축조시 종래의 견해처럼 수개월이 걸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명활산성은 북벽을 정비한 것 이외에는 별다른 복원의 흔적이 없이 방치되어 있지만, 북벽 왼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5분여만 올라가면 성벽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문화유적을 답사할 때에는 현재에 남아 있는 문화재뿐만 아니라, 주변의 풍광과 자연을 즐기는 재미도 답사에서 느끼는 보람에 버금가는데 명활산성은 보문단지의 벚꽃이 절정을 맞는 시기인 4월에 찾을 것을 권하고 싶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명활산성의 석성은 25∼55cm X 20∼45cm 크기의 화강암 석재를 가공한 것을 사용하였는데, 남산신성과 같이 정연하지는 않으나 대충 단을 이루면서 내.외면을 쌓고, 안쪽 속 채움은 토사가 전혀 없는 잡석만을 이용하여 구축하였다. 그리고 사진 우측의 성벽 내측에는 폭 약 4m 내외의 통로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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