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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 여느라 정신이 없는...이성복

관리자 기자
등록일 2009-04-21 20:01 게재일 2009-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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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 있는 꽃들을 바라보다가

저 꽃들에게도 잔치를 열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밤늦도록 찌짐 붙이고

단술을 빚는 여인들에게

잔치는 고역이었으니.

잔치 끝나면 한 보름

호되게 앓아 눕는 여인네처럼

한창 잔치를 여느라 정신이 없는

저 꽃들에게도,

잔치를 열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나는 했다

- 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2003)


아, 이성복! 그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문학과지성사·1980)와 둘째 시집 ‘남해 금산’(문학과지성사·1986)은 당시 젊은 시인들과 시인 지망생들을 열광케 만든 시집이었다. 이성복 시인은 80∼90년대 한국의 젊은 시인들에게는 우상(偶像)이었고 또 정복해야할 높은 산이었다. 넷째 시집 ‘호랑가시나무의 기억’(문학과지성사·1993)이 나온 후 10년 만에 펴낸 시집‘아, 입이 없는 것들’로 보건대 이성복 시인은 여전히 한국시의 우상이고 높디높은 산이다. 꽃들이 활짝 피어 있는 마당이 잔치 마당이겠다. 활짝 피어 있는 꽃들을 보면서 이성복 시인은 이 잔치를 준비하느라 애를 쓴 저 꽃들에게도 잔치를 열어줘야겠다고 한다. 집안의 잔치를 열기 위해 몇날 며칠을 준비하는 여인네들에게 “잔치는 고역”이니, 그 꽃들에도 잔치를 열어줘야 한다는 것, 맞는 말이다. 재미있다. 며칠 전 아버지 제사 때 갑자기 늙은 할머니로 보이는, 갑년의 나이를 넘은 큰 누부와 낼 모레가 환갑인 작은 누부에게 잔치를 열어줘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린 동생을 돌보고 또 남의 집 며느리로, 지어미로, 자식새끼의 어미로 고생고생을 하여 이제 여자(꽃)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다 지워져버린 우리 늙은 누부들한테 조만간 작은 잔치라도 열어줘야겠다. 우리 모두의 생이 “잔치 잔치 열렸네.”였으면 좋겠다.

해설<이종암·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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