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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시집 `종이`를 펴낸 시인 신달자

연합뉴스
등록일 2011-04-07 21:52 게재일 2011-04-07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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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민음사 刊, 신달자 지음, 124쪽, 8천원

신작 시집 `종이`를 펴낸 시인 신달자. /연합뉴스
“종이 시집을 내 보는 것이 오랜 꿈이었다. 그런데 종이가 사라진다는 목소리가 커져 갔다. 종이가 죽었다는 말도 나왔다. 마음이 급해졌다. 문명은 나를 편안하게 했지만 그만큼 정신은 삭막해졌다. 나는 인간의 선한 본성, 그 아름다움에 종이라는 사물을 대면시켜 보고 싶었다. 따뜻함, 영원함, 영성적 노동, 가득함, 화합, 평화, 사랑, 모성, 순수, 고향, 우직함, 이런 충돌 없이 잘 섞이는 감정의 물질들을 하나의 원소로 종합한 것을 `종이`로 표현하고 싶었다.” (`시인의 말`중)

종이책은 수명이 다했다고, 전자책에 길을 내어 주라고 말하는 요즘, 한국 문학의 여성 시를 대표하는 시인 신달자가 `종이`를 주제로 전작 시집을 냈다.

시인은 7년 전부터 이 시집을 마음에 품었다. 그에게 종이의 죽음은 곧 인간의 소중한 가치들이 사라지는 것과 같았고, 그 안타까움은 펜을 움직였다. 썼다가 지우고, 넣다가 빼기를 거듭하며 7년, 바로 지금이 종이를 이야기할 때라는 확신으로 마침내 그간 한 번도 공개하지 않은 시 76편을 거뒀다. 종이가 걸어온 길(`페이퍼 로드`)부터 삶과 글이 하나였던 보르헤스의 삶(`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까지, 시 한 편 한 편에 담긴 종이의 이야기가 다채롭다. 자연의 모든 것에서 종이를 노래하는 그의 시편에는 파괴돼 가는 자연 환경에 대한 안타까움과 사라져 가는 감수성에 대한 슬픔이 구석구석 배어 있다. 그러나 “다만 이 시집은 인간의 따뜻한 본성을 그리워하고 그 본성을 되찾아 보려는 한 톨의 씨앗”이라는 말처럼, 시인은 인간 본성의 따뜻함에 대한 믿음만은 결코 거두지 않는다. 모든 것이 빨라지기만 하는 시대, 맨눈이 아니라 스크린으로 세상을 보는 이 시대는 종이가 필요하다. 인간의 향기가 필요하다.

이 시집에서 모든 사물은 종이로 수렴된다. 여름 나뭇잎은 바탕이 너무 진해서 붓을 밀어내는 진초록 종이고,(`진초록 종이`) 파도는 마구잡이로 구겨 놓아도 다시 일어서고야 마는 푸른 종이고,(`파도`) 가을 들은 바람도 다소곳하게 지나는 고요한 종이고,(`가을 들`) 폭설은 지상의 검은 종이를 덮어 버리는 하얀 순은의 종이다.(`폭설`) 이렇게 신달자는 하얗고 텅 비어 있고 그래서 무얼 느끼기 어려운, 밋밋하다고 어설피 생각해 버리기 쉬운 종이에 살아 움직이는 감각적인 이미지를 부여한다. 생의 모든 것에서 종이를 보는, 생의 모든 것에서 종이의 정신을 느끼는 아름다운 시인의 눈이 경이롭다.

종이의 정신은 또한 인간이 회복해야 할 따뜻한 본성, 즉 인간다움이기도 하다. 문학평론가 김인환은 종이에 대한 시인의 일관된 애정은 “교환 가치가 절대 가치로 작용하는 마케팅 사회에 종이가 부적이 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다고 지적한다. 기실 종이와 종이의 정신이 처한 사정은 녹록지 않다. 기술에 잠식당한 현실은 `예`나 `아니요`로 답할 수 있는 질문만을 질문으로 인정하고, 시장 논리 외에 다른 삶의 원칙을 알지 못하는 개인은 자신과 자신의 카드를 혼동하며 생활한다. 기계화된 문명 속에서 인간은 감탄할 줄 모르는 맥 빠진 존재가 되어 가는 것이다.

“너무 바빠, 시간이 없어, 말을 줄여

글로는 왜 써!

그 안에는 마법의 바람 부나

그 안에는 인간의 심장을 뇌를

영원한 본질을 갉아먹는 이빨이 사나

손들엇!

쓰러지는 것은

결국 우리들의 정신

119를 불러라”

― `119를 불러라`에서

기계 만능, 시장 만능 사회는 겉으로는 번듯하고 잘 정돈된 것처럼 보이지만 안으로는 심장의 고동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죽은 세계다. 이러한 현실을 노래하는 신달자의 목소리는 사뭇 준엄하다. 시인은 우리가 삶의 요청에 제대로 응답하기 위해서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비밀번호도, 지문도, 음성도 아닌 “밤낮 열어 두는/ (중략) 정 깊은 사립문”(`아날로그`)에서 살갗과 살갗을 맞대는 직접 체험이야말로 마음속의 내밀한 감성을 깨운다. 그 감성과 상상력은 곧 인간성의 핵심이다.

아날로그의 감수성은 종이에도 고스란히 전이된다. “찢기기도 하는 닳기도 하는 퇴색하기도 하는 문자가 흐릿해지기도 하는/ 만져지기도 하는 소중하여 한 번 더 읽으려고 귀를 접기도 하는/ 졸다가 가슴에 얹기도 하는 두어 권 베개로 귀로 읽기도 하는 그 편안한/ 본성”(`종이책`)에서 우리는 어머니의 품 같은 포근함을 느낀다. 어둠까지 끌어안아 더욱 따스하게 빛나는 신달자의 시편들은 각박한 사회에서 피폐해진 우리네 마음을 으늑한 눈빛으로 토닥일 것이다.

인생은 글이 적혀 있는 종이다. 사람들은 그 종이에 글을 쓰고 짓고 다시 쓴다. 신달자는 더 나아가서 세상을 커다란 도서관이라고 생각하고 자연을 커다란 종이라고 생각한다. 가을 하늘은 하느님의 종이고, 여름 나뭇잎은 너무 진해서 붓을 밀어내는 진초록 종이고, 파도는 아무리 구겨 놓아도 다시 일어서고야 마는 푸른 종이다. 갯벌, 갈대, 습지, 흑두루미, 큰고니, 노랑부리저어새, 검은머리갈매기?이 모든 것들이 시인이 읽어야 할 글자들이다. 그는 자연의 부름에 대하여 정성을 다해 응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모든 걸 내어 준 사람의 얼굴에 깊게 파이는 주름은 깊은 계곡과 같다. 그곳에 지어 놓은 절은 물살에도 바람에도 떠내려가지 않는다. -김인환(문학평론가)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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