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 150주기 15일 전후 다양한 행사
이날 신앙인들과 사제, 수도자들은 `땀의 순교자` `길위의 사제` `한국의 바오로 사도`로 불리는 최양업 신부의 삶과 신앙을 묵상하며 같은 길을 걷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리고 교회는 이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하는 최 신부의 모범을 신자들에게 보여주고, 최 신부의 공로로 하느님 은혜를 간청해 받는다.
최양업 신부는 성 김대건 신부에 이어 1849년 한국인으로는 두번째로 신부 서품을 받은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 목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실질적으로 한국 교회 성장을 위해 헌신한 첫 번째 한국인 목자로 평가되고 있으며 꺼지지않는 생명력으로 `잠자는 신심`을 일깨운 선각자로 불린다.
무엇보다 그는 뛰어난 성덕과 지도력으로 한국천주교회에 가톨릭 신앙을 일깨운 탁덕의 표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많은 저작을 통해 한국 교회의 내적 기초를 놓는데 일생을 바쳐`한국교회 교부`로 평가되고 있다.
13세의 어린나이로 김대건·최방제 어린이와 함께 한국최초 유학생이자 신학생으로 선택돼 마카오로 떠난 그는 짧았던 생애를 통해 서민대중을 교화시킴으로써 평등정신을 실천에 옮긴 서민대중의 사제였다. 그는 성경 내용을 3,4조나 4,4조로 풀어서 가사를 짓고 여기에 민요가락을 얹은 여러 편의`천주가사`작품을 통해 교리의 토착화를 추구했으며 한문투의 교리서와 기도서를 한글로 저술해 당시 신분이 낮았던 신자들에게까지 널리 전해 `위민(爲民)사상가`로 불리기도 했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서양 음악인 풍금을 배우고 이를 국내에 보급한`서양 음악의 선구자`로도 불리는 그는 한국의 가톨릭 신앙을 재건한 한국판 바오로 사도였다. 기해박해 시절 1년에 7천리를 걸으면서 복음을 전하다 장티푸스와 과로로 41세의 나이에 숨졌다.
이같은 희생적 사목활동 외에도 최 신부의 지식인으로서의 삶은 한국 천주교회 신자들의 영성 삶에서 구체적으로 각인되고 있다.
그는 뿌리깊은 `형제애`와 `인간평등사상`을 바탕으로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 아무도 돌보는 사람 없이 버려진 이들을 찾아다녔고 그들의 처지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당시의 사회 구조에 도전해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봉건제도와 만민의 평등을 저해하는 양반 제도의 폐지를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피지배 계층의 그릇된 세계관을 바꾸기 위해서도 전력했다.
최 신부는 또한 저술활동도 활발했다.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는 여러 장의 라틴어 서신 19통을 비롯해 조선 순교자에 관한 자료 수집, `조선순교자전`의 라틴어 번역, `성교요리문답`및 `천주성교공과`편찬 등의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래서 한국 천주교회는 지난 2009년 최 신부를 복자 반열에 올려달라는 시복시성을 청원해 현재 교황청 전문기구 심의, 심의 결과 판결, 교황 재가 등 나머지 절차를 기다리는 중이다. 복자는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켰거나 생전에 뛰어난 덕행으로 신자들에게 공경의 대상이 된 사람에게 붙이는 존칭이며 성인의 바로 전 단계로 그 지역 가톨릭교회가 공경한다.
전국의 천주교 신앙인들은 최 신부의 선종 150주기인 15일을 전후해 다양한 추모 행사를 연다.
천주교 안동교구는 오는 12일 오전 10시 문경새재 야외공연장에서`하느님은 우리의 희망`을 주제로 교구 신앙대회를 열고 문경새재 기도굴에서 진안리 성지까지 9km를 도보로 순례한다. 15일에는 문경 성당에서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영성을 주제로 학술 심포지엄을 연다.
청주교구는 순례 행사를 갖는다. 12일 충남 부여 금사리 성당에서 추모 미사를 봉헌한 뒤 보령 도화담 공소, 서짓골, 서천 산막골, 작은재 등 최양업 신부의 땀과 열정이 서린 성지를 순례한다.
한편 이에앞서 지난 3월에는 서울 명동성당 가톨릭회관에서 최양업 신부의 선종 150주기 추모 작품이 전시되기도 했다. 조각가 최바오로씨가 제작한 이 추모작품은 2m가 훌쩍 넘는 대형으로 최 신부가 남긴 19편의 편지 내용을 담았다.
/윤희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