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뭐 하능교?”
“응?”
“어! 히야 이거 산밭에 꺼와 똑 같다”
“아이다 임마, 다르다”
“아이다 같다”
“다르다 그이께네, 그건 글씨고 이건 아이따”
“야들아 그만 우리 같이 가보자 왜!”
이렇게 해서 아이들을 대동하고 찾아낸 것이 바로 칠포리 곤륜산의 A지점의 암각화이다. 발견당시 마치 타임머신과도 같이 저 먼 선사의 어느 시대로 필자를 이끈 이 암각화는, 이후 우리나라 선사미술에서 매우 중요한 유적이 된다.
칠포리 암각화는 포항시 흥해읍 칠포리 201번지와 그 주변에 분포하고 있는 유적이다. 칠포리 마을 뒤 해발 177m의 작은 산 곤륜산을 중심으로 해서 구릉지 상두들과 농발산의 산정과 기저, 그리고 이웃마을 청하면 신흥리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에 분포하는 유적이다.
칠포리 암각화는 한국 암각화에서는 유일하게 군집을 이루고 조사된 대규모의 유적으로, 유적을 연결하는 직선거리 총 연장 2.5km에 걸쳐서 나타나는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한다.
서두와 같이 조사된 칠포리 암각화가 이제 발견이후 연구의 역정에서 2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래서 최근 이틀간 이를 기념하는 국제학술대회가 유적이 있는 칠포파인비치호텔 세미나실에서 개최되었다.
학술대회의 목적은 칠포리 암각화의 중요성과 발견의 의미를 되새기고, 앞으로 또다시 시작되어야 할 연구와 보존, 그리고 활용의 장을 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개최되었다고 하겠다.
여기서 우리가 유적발견을 기념한다는 의미는 단지 유적의 발견자체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칠포리 암각화의 발견이라는 것이 단일한 암각화유적의 조사시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한국암각화의 본격적인 연구의 개시를 알리는 상징의미가 반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칠포리 암각화의 연구로 하여 우리는 과거 조상이 꿈꿔 온 이상과 삶의 갈망이 배여 있는 독특한 문화현상의 벨트, 즉 이 땅에서 만들어지고 신앙의 대상이 된 칠포리와 같은 형태의 암각화를 우리는 칠포리형 암각화라고 하는데, 이 칠포리형 암각화를 한반도에서 성립된 소위 `한국식암각화`로 인식하게 된 시점이라는 의미가 더욱 크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한국암각화에 대한 연구는 두 개의 시기로 규정된다.
1970년 울산의 천전리 암각화에 대한 발견조사이후, 오랫동안 여기에 대한 연구의 중심은 울산 천전리와 반구대암각화가 위주가 되었다. 물론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71년의 고령 양전동 암각화도 있었지만, 여기에 대한 연구는 전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89년부터 한두 점 조사되기 시작한 일련의 구조적 형태의 암각화와 함께 칠포리에서 대규모의 암각화가 조사되고, 이 조사에 힘입어 드디어 동일한 칠포리형 암각화가 암각화연구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따라서 1970년대 초에서 1980년대 말까지 20여년은 암각화연구 제 1기로서 울산의 암각화에 집중된 시기라고 한다면, 1990년대로부터 시작된 제 2기의 연구중심에는 당연히 이 암각화가 있다.
칠포리에서 암각화의 발견은 울산 천전리나 반구대암각화라는 큰 연구주제의 자리를 이러한 형태의 암각화, 즉 칠포리형으로 조사된 `한국식암각화`가 대신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기점이 된 칠포리 암각화의 존재감은 더욱 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