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종에서 강한 선풍을 진작시킨 6조 혜능(慧能)이 오조 홍인(弘忍)으로부터 의발을 받을 때 나눈 얘기다. “방아는 다 찧었느냐”, “방아는 찧었지만 키질을 못하고 있다”고 대꾸한다. 그날 밤 삼경(三更), 혜능은 조사(祖師)의 신표(信標)가 될 의발가운데 발우로 받은 그릇은 철발(鐵鉢)이었다.
철밥통이라는 어원은 이때부터 생기지 않았을 까. 그릇은 담는 용기다. 그릇 사용처와 재질에 따라 사기로 만들면 사발이 된다. 국을 담으면 탕기, 탕기의 반쯤 크기면 조치보다. 김치를 담으면 보시기, 간장은 종지, 찬그릇은 쟁첩이다. 물을 담으면 물그릇,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다. 담기는 물건에 따라 달리 불러지는 게 그릇이다.
사람에게 비유할 때는 도량을 두고 말한다. 마음 크기가 크면 국량(局量)이어서 큰 그릇이지만 협량(狹量)이면 소인으로 일컬어진다. 책은 정신을 담는 그릇이요. 덕은 천하를 품는 그릇이다. 그런 그릇 가운데 으뜸은 먹어야 사니 단연 밥그릇이다. 선종의 조사도 신표로 철발을 전했고 성경의 주기도문에서도 일용할 양식을 천명했다. 밥이 보약이기 때문이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갓 찧은 밥은 생명의 맛이다. 반찬이 필요 없을 만큼 맛있는 심(心)미(味)다. 우스개지만 이 밥을 한의사들이 가장 싫어한다. 밥이 보약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밥그릇 때문에 늘 싸움을 벌인다.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하버드대 공부벌레가 된 것도 종내는 랍스타를 마음 놓고 먹기 위해서다.
농경민족은 쌀을 하늘이 내린 귀한 음식이라는 뜻을 살리기 위해 밥그릇은 입구가 안으로 휘는 옥식기로 하고 국그릇은 밥그릇보다 키가 낮고 입이 퍼지는 것을 사용했다. 그래서 밥은 퍼먹고 국은 떠먹는다고 했다.
겨울에는 보온이 뛰어난 놋그릇을, 여름에는 사기그릇을 쓰고 상위에 오르는 그릇의 이름도 종지기, 조치보, 사발, 등 다양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을 먹는 것은 한국의 식(食)문화를 이해하는 열쇠다. 서양에서 건너온 쇠그릇과는 달리 질그릇· 사기그릇 등 도자기가 발달한 것은 온(溫)식에 필요한 보온성이 상대적으로 강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말에는 삶는다· 굽는다· 볶는다· 덥힌다· 찐다· 데운다 등 가열동사가 부지기수다. 이 역시 따뜻하게 먹는 우리의 음식문화 수준과 습관을 나타내는 것.
기마민족은 떠돌이 생활이 습관이 돼 들고 다니는 이동식 식사여서 찬 것을 먹을 수밖에 없지만 농경민족은 모여서 사니 따뜻한 국물이 없이는 밥을 못 넘긴다. 임진왜란 때 왜장은 첩자를 통해 조선 병사나 의군들이 집결, 밥을 먹는 장소를 찾는데 승패를 걸었다고 하는 기록도 있다.
공무원이나 국가 공공기관의 철밥통과는 달리 고고한 이름을 얻는 그릇들이 숱하다. 지난 2008년 10월에 환국한 막사발은 우리민족의 애환이 담긴 귀중한 그릇이다.
일본 교토 국립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국립 중앙박물관으로 돌아온 이 차 사발은 17세기 쯤 야마구치(山口) 하기(萩)에서 구워졌다. 사발 겉 부분에는 한글로 “개가 멀리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써져 있다.
이국땅에서 고향을 그리던 조선 도공의 애절한 표현이다. 이 도공은 난리 중 이 곳 출신 무사들에게 잡혔거나 조선의 흙과 비슷한 곳을 찾다 야마구치에 흘러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경남 남해 하동 진주 김해 등 남쪽에서 살았던 도공들이 일본에 주로 끌려 갔다. 일본 영주들은 한 시대를 앞선 기술을 가진 조선도공들이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배려를 했다고는 하지만 고향을 그리는 마음만은 빼앗지 못했다.
일본인들이 국보로 떠받들고 있는 `기자에이몬오이도(喜左衛門大井戶)`는 누리끼한 색깔을 띠고 잔금이 나 있다. 19세기는 물론 20세기 초까지 우리 집 부엌에서 볼 수 있었던 막사발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