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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 있는 삶과 교육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11-07-14 23:21 게재일 2011-07-14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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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최근에 듣기를, 2015년부터는 모든 학교 교과서를 디지털화한다고 한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교실에 앉아 있는 학생들이 모두 칠판 대신에 전자 화면을 보고 있는 광경이다. 학생들은 종이 교과서도, 공책도 없이 그냥 앉아서 칠판 앞의 선생님이 전자 화면을 작동하는 것을 보고 있다. 물론 학생들 각자 자신의 단말기를 갖고 있어 학교에서는 자기 기기의 화면을 보고 집에 가서는 컴퓨터를 보면서 예습, 복습을 하게 될 것이다.

또 들으니, 미국의 인디애나 주에서는 초등학교에서 손으로 글씨 쓰기를 익히는 수업을 필수과목에서 선택과목으로 돌리고, 대신에 타이핑하는 것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해서 가르치기로 했다고 한다. 당장 학부모들이 아이들이 서명도 못하게 될 것이라며 반대하고 나섰다지만 그곳도 교육당국이 밀어붙이는 것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방법은 없을지 모른다. 필자의 세대에는 연필을 힘주어 잡은 나머지 오른쪽 검지에 굳은살이 박힌 걸 평생 갖고 살아야 했는데, 이런 세대는 이제 없어지려는 것일까?

그렇지만, 일본에서는 소학교 학생들이 학교에 휴대폰을 가지고 오는 게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휴대폰이 학생들 수업에 미치는 악영향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요즘 같이 험한 세상에 그럼 아이들을 어떻게 보호하나? 그런 염려 때문인지 일본에서는 학생 쪽에서는 오로지 한 곳에만 연결할 수 있는 휴대폰이 제작, 판매되고 있다. 이 간편형 휴대폰에는 숫자 버튼이 없고 버튼이 달랑 하나다. 그리고 대개는 부모이게 마련일 보호자와 아이가 통화를 끝내면 당장 보호자의 휴대폰에 아이의 위치가 뜬다. 받을 수 있는 번호도 열 개 정도로 등록된 것만 받을 수 있고 보내기는 한 곳에만 보낼 수 있는 휴대폰은 아이도 보호하면서 휴대폰 사용의 악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교육은 사람의 삶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삶을 총체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의 삶이 인공적인 만큼이나 자연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욱 자연으로서의 삶이 우리에게 근본적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서 쓰고 보는 것이 아무리 정교하고 화려하다 해도 근원에서 보면 결국 우리는 몸과 마음을 가진 하나의 개체적 존재일 뿐이다. 그리고 이 개체적 존재는 나서 성장하여 장성해서는 늙어 삶을 마감한다. 우리는 우리의 손과 발로 일하고 먹고 쓰고 돌아다닌다. 그러므로 우리가 총체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이리저리 쓰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육체성과 정신성 때문에 우리는 서예나 펜글씨나 조각이나 그림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손으로 뜬 수공예품을 기계로 찍어낸 것보다 높게 치고 노트에 손수 쓰는 것을 타이핑하는 것보다 가치 있게 여긴다.

필자는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여행할 때가 있었다. 둘 중 어느 나라가 더 잘 사는가? 물론 한창 경제 개발 중인 베트남 쪽일 것이다. 그런데 베트남의 공예품들은 대부분 기계적인 생산 체제로 바뀌어서 그런지 조악스럽기 짝이 없었던 반면, 캄보디아의 수공예품들은 아직까지 아름다운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이렇듯 수공으로 만들어져 오로지 그것 하나밖에 없고 그래서 그것이 어떤 신비스러운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을 가리켜 `아우라`라고 한다. 우리들 각자는 어떤 아우라를 간직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더욱 더 개체적일수록, 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독자적일수록, 그만큼 더 짙고 깊어진다.

교육은 저마다 아우라를 간직하고 키울 수 있도록 이루어져야 한다. 기술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개성을 해치고 저마다 가진 아우라를 삭제토록 한다면 결코 좋다고만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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