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은 영혼을 담금질하는 축복
찬란한 노을 보는 희망을 노래하다
부드러움과 강직함 속에 녹아드는 맑고 투명한 언어로 세상을 감싸안으며 전통적인 서정시의 진경을 펼쳐온 시인은 5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예와 다름없이 삶에 대한 성찰과 긍정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진솔한 시편들을 선보이고 있다.
“앞에는 아름다운 서정을 두고 뒤에는 굽힐 줄 모르는 의지를 두고 끝내 그것들을 일치시키는 시인의 타고난 영성(靈性)”(고은 시인)이 지나오는 동안 폭과 깊이를 더해 메마른 가슴과 고단한 몸을 적시는 단비가 돼 흘러내린다.
도종환의 시는 사랑과 연민에 뿌리를 둔 희망의 노래이다. 가난과 외로움으로 얼어붙은 “빙하기로 시작한 어린 날”(`빙하기`)로부터 “흥건한 울음”이 넘치던 “생의 굽이 많은 시간”(`귀뚜라미`)을 지나온 시인은 “모진 세월 속에서 푸르게/자신을 지키는 이들이 있는 걸” 고마워하며 “작은 것에도 크게 위안받는”(`제일(除日)`)다. “툭하면 발길로 나를 걷어차곤 했”(`인포리`)던 세상이지만 상처와 아픔마저도 축복으로 받아들이며 고통 속에서도 새살이 돋는 희망의 안쪽을 바라본다.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시에서 한시 사이는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아직도 내게는 몇시간이 남아 있다/지금은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부분)
도종환 시인은 빼어난 서정시인이면서 교육운동가이자 문화운동가로서 청춘의 빛나던 시절을 아낌없이 바쳐왔다.
“모든 몸이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는 꿈”(`몸에 대한 블라지미르 쏘로킨의 발제`)을 잃지 않는 시인은 “어떤 모형을 사회에 강제로 도입하기 위해 인간적 가치들을 버려야 한다면 그것 또한 폭력”(`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신`)이라는 결론에 도달해 다시금 시퍼런 정신을 벼리며 사회의식으로 지평을 넓힌다.
시련을 영혼의 담금질이라고 생각하는 시인은 더불어 살아가는 청안한 삶을 꿈꾼다.
시인은 8년 전인 2003년 3월 심신 허약으로 쉽게 피로가 찾아오는 `자율신경 실조증`이란 병을 얻어 교사직을 그만두고 충북 보은군 내북면 법주리 산방(山房)으로 들어갔다.
오랜 시간 산속에서 생활한 시인은 풀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에도 의미를 두고 흔들리며 피는 꽃 한송이에도 애정을 담는다. 더욱이 “주목받지 못하는 곳에서/혼자씩 젖”(`나무들`)으며 “머물 곳을 찾지 못하는 영혼들”(`맨발`)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길은 애틋하기 그지없다.
굽이 많은 생을 지나온 시인은 어느덧 인생의 오후에 접어들었다. “허전해지는 삶의 한 모서리 사리물고”(`발치(拔齒)`) 평온한 속도로 “바람 속에서 갈기털을 휘날리며 산을 넘는”(`악령`) 시인의 어깨 위로 “반쪽 달빛”(`하현`)이 환하게 내려앉는다. 시의 산길을 밝히는 희망의 빛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창비 펴냄, 도종환 지음, 132쪽, 8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