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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에서 먼 곳으로 떠난 임하댁(臨河宅)

영남이공대 교수
등록일 2011-08-18 21:38 게재일 2011-08-18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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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댁이 이전한 구미 일선리, 원래 임하댁의 사랑채와 안채
수몰지역 지표조사에 열중하던 1985년 여름이었다. 해가 긴 여름에는 하루에 2집 정도는 실측을 하는데 하루는 종일 한집에만 머물렀다. 건물의 평면과 배치를 실측하고 안과 밖 그리고 전경 사진을 찍으면 한집조사가 끝나는데, 이 집은 목구조 부재의 상세스케치까지 하면서 늑장을 부렸다. 점심을 배불리 먹은 탓도 있고 해서 염치불구하고 사랑마루에 길게 드러눕고 말았다. 바로 그 집이 `임하댁(臨河宅)`이었다.

임하댁은 류치검(柳致儉,1807~1853)이 전주 류씨 박곡종택에서 수곡리로 분가한 후 수재 류정호(修齋, 柳廷鎬, 1837~1907)가 집터를 마련하고 염암 류연구(恬庵 柳淵龜, 1861~1938)가 지은 집이다. 그래서 수재고택(修齋古宅)이라고도 부른다.

조사 당시 이 집의 소유주이자 7대손인 `류회붕`씨는 인근 임동중학교 교사였는데 필자가 실측조사를 떠나기 전 이미 필자의 건축과 선배(김희준 교수)를 통해 소유주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은 터였다. 대학시절 영남대 `대맥` 써클 친구로 너그럽게 생긴 모습만큼이나 마음도 넉넉하다고 들려주었다. 그런데 필자를 처음 만난 집주인은 조금은 긴장한 모습으로 “저~ 우리 집이 문화재로 지정받기는 어렵겠지요?”라며 말을 붙여왔다. 하지만 그 물음에 “오랜만입니다, 류 선생님” 하고 일에만 몰입했다. 한참 뒤 “근데 우째 저를 아니껴?”라며 은근히 안동지방 사투리로 다시 물어왔다. 필자가 조금은 당돌했던 것 같기도 해서 “나중에 말씀드리지요”라고 답하고 조사를 계속 했는데 아마 그 시간이 집주인은 엄청 지루했으리라 생각한다. 도대체 다른 집들은 한나절이면 다 끝나던데 자기 집만 마냥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무슨 조짐인지 황당했으리라 생각한다.

문화재위원은 집이 지닌 이치를 터득하려면 그 집에 담긴 내용을 먼저 찾아야 한다. 사실 필자는 그날 이집의 건축적 특징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꼼꼼히 기록도하고 스케치도하고 사진도 많이 찍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이 집의 특징이 건물의 배치였다. 안채와 사랑채가 수건 건(巾)자 형으로 놓여있었는데 이는 경상북도 북부형 민가의 폐쇄적인 건축 공간 형식을 유지하면서 건물간의 일조문제와 동선의 효율성을 높인 보기 드문 배치 형태였다. 북부지방의 `口`자형 몸채가 `巾`자형으로 변형된 새로운 형태로 문화재적 가치를 한층 돋보이게 하였다.

임하댁은 1989년 원래 있던 안동 수곡에서 멀리 구미 해평 일산리로 이건하였고 당시의 집 주인도 지금은 교직에서 은퇴 후 이곳에 거처하고 있다고 한다. 그 날 실측조사를 끝내고 결국 이 집에 하룻밤 유하면서 지금은 댐 속에 잠긴 집 앞 개울에서 밤새 장어를 잡아 집주인이 내민 곡차와 함께 했었다.

/영남이공대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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