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의 엄지`(문학동네 펴냄)는 그런 작가의 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으로, 제62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같은 해 나오키 상과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최근에는 영화화가 결정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젊은 시절 사채조직의 덫에 걸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공통점을 지닌 중년 남자 다케자와와 데쓰. 달리 의지할 곳 없는 둘은 각자의 기술을 이용해 함께 크고 작은 사기를 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 그들 앞에 예쁘장한 외모를 이용해 상습적으로 소매치기를 하는 소녀 마히로가 나타난다. 역시 사채업자에 시달리다 엄마가 자살한 과거가 있는 마히로와 언니 야히로, 그리고 그녀의 애인 간타로까지 엮이면서 다섯 명의 좌충우돌 동거생활이 시작된다. 그러나 어느새 가족처럼 가까워진 이들의 안락한 생활도 잠시, 다케자와를 쫓는 사채조직의 위협은 날이 갈수록 강도가 높아져만 간다. 불공평한 세상을 언제나 인내하며 살아왔던 이들은 지금껏 뒷골목에서 쌓아온 모든 노하우를 끌어모아 공동의 적 사채업자 히구치에게 복수를 꾀하는 대규모 사기극, 일명 `앨버트로스 작전`을 계획하는데….
일반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사회부적응자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겠지만, 소설에서는 빈곤한 삶이나 범죄의 어둠이 자아내는 칙칙한 분위기를 찾아볼 수 없다. 작가 특유의 유머러스하고 경쾌한 문체, 범죄자이긴 하지만 결코 `악인`이 아니며 은근히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면을 지닌 등장인물들의 재치 있는 대화, 그리고 군데군데 등장하는 기발한 말장난 덕분이다. 제목에 등장하는 `까마귀` 역시 `검다`라는 뜻의 일본어와 발음이 비슷한 `프로 사기꾼`을 뜻하는 은어로, 작중 다케자와와 데쓰의 대화에 중요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오는 말장난들에서 상징적인 의미와 복선을 찾아내는 것은 `까마귀의 엄지`에서만 접할 수 있는 독특한 재미이다. `까마귀의 엄지`는 치밀하게 짜여진 대규모 사기극을 중심에 두고 쓰여진 대중소설이지만, 그에 앞서 각양각색의 인간군상을 묘사하며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그려낸 작품이기도 하다.
/윤희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