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데뷔 17년차인 그녀는 그사이 네 권의 시집을 펴낸 것이니 근 4년 만에 한 권씩은 새 부대에 새 술을 담아온 참이다. 그리 과할 것도 그리 부족할 것도 없다 싶다. 이번 새 시집에 담긴 시가 52편이니 어림잡아 지금껏 이백 편에 가까운 시를 썼겠구나, 싶은 계산이 나오는데 따지고 보면 한 달에 한 편쯤은 된다. 한 달에 한 번쯤은 “머리 속 언어의 알에 뭔가 수상한 낌새가 감지되”었을 터, “이게 그냥 곤계란인지 아님 뭔가 톡 튀어나올 건지 밤새도록 지켜”봤을 터, 그러다가 “여보세요 그 안에 누가 있나요 노란 솜털의 비약비약 울기 좋아하는 시인 혹시 거기 있나요” 두드려보기도 했었을 터(`나는 비약을 사랑하는 시인의 알에 불과할 뿐`), 품고 있는 알에 실금조차 안 갔다 해도 어쩌랴, 사실 이렇게 관심으로 두드리고 듣고 느끼려하는 과정이 죄다 시인걸. 그렇다. 어찌 보면 이 시집은 올해로 `마흔 다섯`이 아니라 `마음 다섯`이 된 시인 성미정의 여전한 성장일기이며 관찰일기라 할 수 있겠다. 나이는 먹는 대로 자라는 게 아니지만 마음은 먹는 대로 자라는 거니까.
성미정이 펴낸 시집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시집마다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이들을 모아보니 오롯이 한 여자의 역사다. 첫 시집`대머리와의 사랑`에서 소녀였고 처녀였던 그녀가 두번째 시집`사랑은 야채 같은 것`에서 연애와 결혼을 경험하며 살림하는 아내가 되더니 세번째 시집 `상상 한 상자`에서 `재경`이라는 아들의 엄마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네번째 시집 `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에서 그녀는 포지션을 어떻게 취했을까. 물론 아내이며 엄마의 직함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은 앞선 시편들 때와 같으나 추가된 위치가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이가 들어 쓴 김치를 담글 수밖에 없는 예순일곱의 엄마, 이명클리닉에 다니는 일흔넷의 아빠, 이 두 분의 `둘째 딸년`이란 자리다.
엄마가 담근 새콤한 김장 김치 김장독에서 막 꺼내 살짝 살얼음이 낀 김치 한 보시기에 따뜻한 밥만 있으면 겨우내 반찬 걱정 없던 기억들은 친정집 뒤란의 장독대와 함께 사라져버렸는데 엄마는 지치지도 않고 매년 김치를 담고 있다 육십칠 년 성상(星霜) 엄마의 인생이 쓰디써 엄마 손에 남은 건 쓴맛뿐인 듯한데 그래서 김치 담그는 날이면 행여 어린 새끼들 눈 매울까봐 애태우며 김치 속 버무리느라 더 새빨개지던 그 손으로 거둔 딸년 둘도 외면해버린 김치를 엄마는 매년 쓰고 있다
-`엄마의 김치가 오래도 썼다` 중에서
아이가 제법 자라고 보니 그제야 늙은 부모가 눈에 밟히더라는 우리 모두의 때늦은 후회를 시인도 아마 요즈음 겪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시인의 재주는 슬픔을 눈물 대신 일종의 농담이나 펀(fun)으로 승화시키는 데 있다. 꽤나 심각한 상황에서도 시인은 주위를 환기시키고 짐짓 딴청을 부리듯 농을 칠 줄 안다. 뭔가를 툭, 하니 걸고넘어지는 것이다. 더 쓸쓸해지지 않도록, 더 절망하지 않도록.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시인인 남편과 함께 장난감 가게를 운영하며 사는 시인에게 동화는 상상 그 너머의 무지갯빛 신세계라기보다 생활 그 자체다.
/윤희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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