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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11-11-04 23:09 게재일 2011-11-04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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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락포항장성요양병원장
미국 프로 야구 축제장에서 오심 판결이 일어났다. 백악관마저도 판결의 번복을 권했지만 위원회는 `오심도 판결의 한 부분`이라고 하면서 받아 들이지 않았다. 심판이 판정을 잘못하여 퍼펙트게임을 놓쳤다고 한다. 그러나 심판 개인은 잘못을 인정하고서, 투수에게 미안함을 표시했다. 투수는 울면서 그것을 받아 드렸다고 한다. 미안함을 표시하고 그것을 받아 주는 용기가 감동적이다. 이럴 때의 용기가 진정한 용기다.

일반 사람들도 잘 알고 있는 성경의 `탕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신의 사랑을 설명해 보자. 차남인 그는 아버지에게 강요하여 재산을 분배 받아 멀리 떠난다. 호화생활을 하다가 전 재산을 잃어 버렸다. 목축업을 하는 집에 소·돼지를 먹이면서 겨우 밥을 얻어먹게 된다. 어느 날 조용한 밤에 별을 보면서 생각에 잠기다가, 심한 꾸중을 들을 각오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한다.

오매불망 자식을 걱정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동네 입구에 돌아오는 차남을 보고는 급히 달려나가 껴안고서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며칠 후 동네 사람들에게 살아서 돌아온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벌린다.

장남은 매일 아버지를 도와서 묵묵히 열심히 일했는데도 잔치를 해 주지 않자 아버지에게 “왜 나를 위해서는 잔치를 베풀지 않느냐?”고 불만을 표현한다. 그때 아버지는 “차남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까 잔치를 한다”고 대답했다. 착실한 장남보다도 걱정 뭉치인 차남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인간의`부모의 자식 사랑`은 `신의 사랑`과 동일하다.

인간사회적인 입장에서는 장남의 말이 맞다. 그러나 자식을 키워보면 잘 된 자식에게는 걱정을 적게 하지만, 여러 가지로 모자라는 자식에게는 계속 많은 걱정과 관심(사랑)이 간다.

용서는 영혼의 양심이다. 진리에 빚을 진 사람이 그 빚을 갚으려는 거룩한 행위다. `용서 못해!`는 남을 용서하지 않는 만큼 자기도 잘못하면 절대 용서를 받지 않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용서의 혜택은 용서하는 자기 스스로가 제일 많은 이득을 받는다. 종교 입장에서 자기는 용서 받지 못할 존재(죄인)이면서도 상대를 용서를 한다면, 그 행위는 그가 죄인 한 사람을 석방시켜 주는 것과 같은 정도로 선행을 한 것이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하는 것은 안 된다.

삶에서 행복하게 살려면 `용서를 주고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 `바르게 산다`는 것은 그것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기준이 강하게 작용한다. 그래서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어서, 최선의 삶은 아니다.

용서는 신의 사랑과 연결됨으로 신의 영역이다. 용서는 신과 나 사이의 단어다. 절대자에게 나의 마음을 아뢰는 것이다. 용서는 사랑의 극대화 상태로서 조건이 없다.

그가 나에게 `정중히 사과해야 용서한다`는 것은 좋지 않다. 잘못을 저지른 자도, 자기가 정말로 용서받아야 할 정도로 나쁘다고 느끼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는 오히려 `어느 정도`는 잘했다고 생각한다. 상대편에게도 잘못이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에서 일방적인 잘잘못은 거의 없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잘잘못의 경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당사자에게 직접 용서를 받지 않고 불우 이웃 돕기 등 다른 서비스를 열심히 해 간접적으로 용서를 받을 수는 없다. 이것은 부차적인 방법이다. 영화 `밀양`에서는 유괴 희생된 아들의 어머니가 유괴범을 용서하기위해 그를 만났을 때 부모로부터 용서받기 이전에 벌써 기독교를 믿고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와 구원 받았다고 말하는 것에 어머니는 미칠 정도로 실성하게 변해 버렸다. 어머니가 용서를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먼저 용서해 버렸다니…. 용서는 직접 당사자로부터 받아야 한다.

어떤 일에서 용서받았다고 하여 그 때부터 그 일이 그가 잘한 것으로는 변하지는 않는다. 신으로 부터 면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용서한다고 꼭히 친구같이 지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친구 되기 싫은 경우가 아주 많다.

용서의 제일 좋은 방법은 분노(앙심)를 포기하는 것인데 이것은 어렵다. 용서란 나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 과거라는 틀에 갇힌 나를 해방하는 행위다. 즉 용서는 과거의 것에 대한 것이고 화해는 지금부터 미래를 향한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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