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성폭력 비틀린 욕망 등 출구가 없는 시대
현대사회와 인간에 대한 문제의식 아프게 꼬집어
그는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잘 쓰는` 소설가이다. 20대 초반에 작품활동을 시작해 거의 스무 해 가까운 시간 동안 이번 소설집을 포함해 무려 열한 권의 책을 펴냈으며, 늘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구성으로 독자를 사로잡으며 흥미로운 소재를 통해 인간과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를 던지는 소설들을 선보여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작품활동 내내 흔들림 없이 매번 스스로를 넘어서는 발전된 면모를 보여왔다. 이번 소설집에서도 한눈에 드러나는바, 단정하고 유려하기로 정평이 높은 문장은 한층 더 정련되고 절제되었으며, 플롯과 디테일도 더 정교하고 생생하다.
그는 어쩌면 `소설을 잘 쓰는 법`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스스로 `업그레이드`하는 방법까지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새 소설을 읽을 때마다, 독자들은 김경욱에 대한 기대를 갱신하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 빛나지 않는 존재인 인간에게 어둠은 언제 찾아오고 언제 물러나는가. 스스로 빛나지 않는 사내에게 어둠은 찾아왔다 물러가는 것이 아니었다. 어둠은 늘 있었다. 찾아왔다 물러갔다 다시 찾아오는 것은 빛이었다. 사내는 이제 아주 오래 기다려야 하는지도 몰랐다. 나무처럼, 한그루 나무처럼. 말을 잃은 계집애를 등에 업은 채.”(`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에는 전작들에 비해 훨씬 건조하고 묵직한 분위기의 작품들이 눈에 띈다. 소설집의 첫 작품이자 표제작인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는 하드보일드한 색채가 강렬한 작품이다. 같은 반 친구들에게 성폭행을 당해 후유증으로 말을 잃은 초등학생 손녀와 재개발지역에서 단둘이 살아가는 사내가 있다. 이미 가스가 끊기고 곧 전기와 수도마저 끊길 막막한 상황이지만, 그는 보상금을 거부하고 가해자 아이들의 집을 찾아 치밀한 복수를 준비한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복수는 그를 둘러싼 완강한 현실에 어떤 의미있는 타격도 가하지 못한 채로 막을 내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한가닥 희망은 언뜻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미미할 뿐이다. “이 도시에서만 수백개의 수도계량기가 동파된 월요일 아침”, 암울하고 긴장감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 복수를 준비하는 사내의 행동이 냉정하고 담담하게 그려지는 가운데, 사내가 처한 상황의 암담함과 사내가 뿜어내는 의지의 박력이 서로 맞부딪치며 둔중한 울림을 전한다.
`하인리히의 심장`은 두 남녀의 불가사의한 죽음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건조하게 나열한다.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인물들의 황량한 내면과, 끝내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 비현실적인 죽음 앞에서 망연히 서 있는 형사의 모습이 아득한 궁금증을 남기는 작품이다.
출구 없는 가난에 짓눌린 남자들 삼대의 생활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태양이 뜨지 않는 나라` 또한 이들의 일상이 어떤 전망도 기대할 수 없이 무한히 반복될 것임을 보여주며 시종 음울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한편 사회적 계층의 문제가 이야기의 핵심을 구성하는 작품들도 눈길을 모은다. 취업 사수생 과외교사 주인공과 압구정동 고등학생 커플의 한강변 데이트를 그린 `러닝 맨`은 한강변에서 수차례 마주치는 `뱀 문신을 한 사내`와 누렁개를 쇠줄에 묶어 끌고 가는 오토바이 등이 부녀자 납치강도사건에 대한 소문과 병치되면서 막연한 불안과 긴장감으로 독자들을 우선 사로잡는다.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99%`는 1퍼센트의 상류층을 향한 우리의 속물적 욕망을 되비춘다. 광고회사에 다니는 최대리는 어느날 스카우트되어온 미국 유학파 스티브 킴에게 위기감과 열등감을 느끼는데, 그럴수록 스티브 킴이 사실은 고등학교 시절 자신이 전학간 학교에서 2등의 자리로 끌어내렸던 김태만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사로잡힌다.
소설은 그럴듯한 증거를 조금씩 흘리며 독자로 하여금 스티브 킴의 정체를 궁금하게 만들지만, 종국에는 스티브 킴이 김태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도록 열려 있다. 그로써 소설은 스티브 킴에 대한 최대리의 의심이 어쩌면 그를 향한 질투와 선망이 낳은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추측마저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열린 구조와 미스터리한 장치를 활용해 소설 속 인물의 시선을 이중 삼중으로 뒤집어 보이며 독자의 허를 찌르고 나아가 독자 자신의 욕망을 되돌아보게 하는 수법이야말로 그의 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장기이며, 이것이 소설의 중핵에 있는 현실의 문제를 보다 풍부하게 드러내주는 것임은 물론이다.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 `아버지의 부엌`에서, 어린시절 `미미의 부엌`을 갖고 싶어한 자신의 꿈을 용납하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으로 내내 타인의 선택에 이끌리기만 하는 인생을 살아온 주인공 남자는 오랜만의 귀향길에서 비좁고 더러운 아버지의 부엌을 마주한다.
소설의 말미에 부자가 함께 찾은 미술관에서, 핑크색 `미미의 부엌`을 확대해놓은 설치미술작품에 기대앉아 있는 아버지의 늙고 지친 모습을 주인공이 바라보는 장면은 이들 부자의 어긋난 욕망과 삶을 선명한 이미지와 상징으로 축약해 보여준다.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한 이 장면에 이르러서야 `부엌`을 매개로 아버지와 주인공의 인생이 서로 통할 가능성이 희미하게 제시되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처럼 김경욱의 소설은 능란한 수법으로 독자를 이끌어 손에서 책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이윽고 이야기 속에 숨겨진 인간의 심연, 또는 이야기의 심연이라 할 공간을 독자에게 열어 보인다. 곱씹을수록 더 크고 깊어지는 이 심연 앞에서 다만 독자들은 그 여운을 음미하고, 나아가 찬찬히 스스로 그 심연에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김경욱 소설이 지닌 힘이자 그만의 매력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창비 펴냄, 김경욱 지음, 300쪽, 1만1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