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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삶의 풍경과 싹트는 생명의 소리

윤희정기자
등록일 2012-01-27 16:05 게재일 2012-01-29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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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수 시인 여덟번째 시집 `적막 소리` 창비 펴냄, 1242쪽, 8천원
삶을 바라보는 깊은 통찰력과 섬세하고 감각적인 시어가 반짝이는 선명한 이미지 묘사로 통상적인 서정시와는 다른 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온 문인수(67·사진) 시인의 여덟번째 시집 `적막 소리`(창비)가 출간됐다.

불혹을 넘긴 나이에 늦깎이로 등단한 이후 미당문학상 등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며 “황혼의 전성기”(정현종 시인)에 이른 듯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주는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폐경기를 모르는 시인”이라는 젊은 시인들의 존경 어린 감탄에 걸맞게 “한편 한편 아름답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신경림`추천사`)는 빼어난 시편들을 선보인다.

문인수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중심에서 비켜나 소외되어 있다. “죽은 남자를 부여잡고” “하염없는 넋두리에 빠져 있”는 미망인(`개펄`), “도심 인파 속을 홀로/온몸을 구부려” “다만 골똘히 걷는” 노인(`지팡이`), “뭉툭한 왼팔에 바구니를 걸고/성한 오른손으로 뻥튀기”를 파는 “전직 프레스공”(`파군재의 왼손`) 등. 시인은 그들이야말로 삶의 진경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라 여겨 이들의 애절한 사연을 끌어안는다. 그리고 한편으로 고요한 삶의 풍경을 그려내며 그 속에서 싹트는 생명의 소리를 귀담아듣는다.

“적막도 산천에 들어 있어 소리를 내는 것이겠다./적막도 복받치는 것 넘치느라 소리를 내는 것이겠다./새소리 매미소리 하염없는 물소리, 무슨 날도 아닌데 산소엘 와서/저 소리들 시끄럽다, 거역하지 않는 것은/내가 본래 적막이었고 지금 다시/적막 속으로 계속 들어가는 중이어서 그런가,/그런가보다. 여기 적막한 어머니 아버지 무덤가에 홀로 앉아/도 터지는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소주 몇잔 걸치니, 코끝이 시큰거려 냅다 코 풀고 나니,/배롱나무꽃 붉게 흐드러져 왈칵!/적막하다. 내 마음이 또 그걸 받아 그득하고 불콰하여 길게 젖어 풀리는/저 소리들, 적막이 소리를 더 많이 낸다.”(`적막 소리`부분)

“비린 가난”(`햇잎`) 속에서 변두리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을 어루만지는 시인의 손길은 부드럽기 그지없으나, 연민에 빠지지 않고 일정한 거리에서 그들의 그늘진 삶을 관찰하면서 하나의 풍경으로 형상화하여 깊은 울림을 자아낸다. 그에 못지않게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 또한 예사롭지 않다. “해 넘긴 달력을 떼”어낸 자리를 보며 시인은 “쌀 떨어진 것”처럼 허탈함을 느끼다가 “무슨 문이거나 뚜껑”인 것처럼 “열고 나가”거나 “쾅, 닫고 드러눕는” 곳으로 생각한다.

“해 넘긴 달력을 떼자 파스 붙인 흔적 같다./네모반듯하니, 방금 대패질한/송판냄새처럼 깨끗하다./새까만 날짜들이 딱정벌레처럼 기어나가,/땅거미처럼 먹물처럼 번진 것인지/사방 벽이 거짓말같이 더럽다./그러니 아쉽다. 하루가, 한주일이, 한달이/헐어놓기만 하면 금세/쌀 떨어진 것 같았다. 그렇게, 또 한해가 갔다./공백만 뚜렷하다./이 하얗게 바닥난 데가 결국,/무슨 문이거나 뚜껑일까./여길 열고 나가? 쾅, 닫고 드러눕는 거?//올해도 역시 한국투자증권,/새 달력을 걸어 쓰윽 덮어버리는 것이다.”(`공백이 뚜렷하다`전문)

평론가 권혁웅은 “세속의 삶을 점묘하는 시인의 탁월한 문체를 문인수류(類)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단문 사이에 툭툭 던져넣는 무심한 잠언들, 구어적인 문장들의 정점에 출현하는 문어적인 요약문들, (통상의 여운이 아니라 울음을 끌고 다니는) 뒤가 깨끗이 잘려나간 결구들, 인물의 일대기마저도 장면화하여 감치는 솜씨야말로 문인수의 시가 우리 시에 소개한 새로운 문체”라고 말한다. 그의 시는 필부필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되 미학적으로는 엄격함을 추구한다. 그는 고통을 쉽게 미화하지 않는다. 가난한 삶에 대한 연민 없는 공감은 문인수의 시가 펼쳐보이는 서정의 진수다.

“개펄을 걸어나오는 여자들의 동작이 몹시 지쳐 있다./한 짐씩 조개를 캔 대신 아예 입을 모두 묻어버린 것일까,/말이 없다. 소형 트럭 두 대가 여자들과 여자들의 등짐을,/개펄의 가장 무거운 부위를 싣고 사라졌다.//트럭 두 대가 꽉꽉 채워 싣고 갔지만 뻘에 바닥을 삐댄 발자국들,/그 穴들 그대로 남아/낭자하다. 생활에 대해 앞앞이 키조개처럼 달라붙은 험구,/함구다. 깜깜하게 오므린 저 여자들의 깊은 하복부다.(`만금의 낭자한 발자국들`전문)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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