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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채기를 공유한 낯선 타인들이 만나 가족이라는 기적이 된다

윤희정기자
등록일 2012-04-13 21:44 게재일 2012-04-13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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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펀치`

한국소설의 참신한 상상력을 발굴하기 위해 창비가 제정한 창비장편소설상의 5회째 수상작인 기준영<사진> 장편소설 `와일드 펀치`(창비)가 출간됐다. `와일드 펀치`는 담담하고 절제된 대화들로 여백의 서사를 선보이고, 성숙한 소설적 시선으로 현대인이 실감할 수 있는 공감과 소통의 문제를 내세우면서 서사적 울림으로 확장해가는 역량을 높이 평가받았다.

2009년 등단작 `제니`로 문단에 신선한 긴장감을 불어넣었던 신예작가 기준영은 이번 첫 장편에서 여전히 개성 넘치며 한결 풍성해진 감수성으로 앞으로의 행보에 기대를 갖게 한다.

`와일드 펀치`는 언뜻 뚜렷한 서사가 존재하지 않는 듯한 독특한 플롯과 분위기를 지닌 소설이다. 이야기는 중산층 부부 `강수`와 `현자`의 결혼기념일에 이 부부의 이층집으로 강수의 친한 동생 `태경`과 현자의 어린 시절 의자매 `미라`가 찾아오며 다소 갑작스레 시작된다. 등장인물들의 감각적인 대사가 돋보이는 이 소설은 이야기의 의도적 분절과 장면전환 연출로 영화적인 느낌을 준다. 인물들의 대사 속에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며 `서사`가 아닌 `장면`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전개는 일견 토크쇼의 한 대목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함축적인 대화 속에 숨겨진 등장인물들의 사연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독자의 소설적인 상상력을 요하며 여기에 이 소설을 읽는 남다른 재미가 있다. 첫 만남 이후 진부한 약속의 말 없이 자연스럽게 시작된 태경과 미라의 연애처럼 이 소설은 별다른 설명과 군더더기는 생략한 채 세련된 솜씨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쓸쓸하다가도 어느새 따뜻해지고 건조하다가도 한순간 서정적인 대화들은 충돌하고 때로 어긋나며 한잔의 `와일드 펀치`처럼 묘한 조화를 이룬다.

한편 우연히 시작된 네 남녀의 이야기는 기댈 곳 없는 소년 `우영`이 끼어들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어느날 갑자기, 전혀 다른 과거를 안고 얽히게 된 이 인물들에게는 고된 가족사라는 공약수가 있다. 각자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부재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이들은 서로의 생채기를 공유했다 멀어지고 다시 어루만지는 위안의 여정을 되풀이한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 유사한 상처를 떠올림으로써 타인의 상실과 아픔에 연민을 느끼는 유대감의 형성 과정은 상당히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미라와의 인연으로 우영이 인물 관계도의 한 축에 들어오게 된 것은 우연이지만 이 소년이 강수와 태경이 공유한 아픔을 치유하는 중요한 계기로 부각되는 결말은 이들의 만남이 결코 우연만은 아님을 넌지시 암시한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외로운 소년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고 그 위로가 다시 소년을 험한 세상에서 지켜줄 울타리가 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세심한 독자는 위로의 순환을 목격한다. 낯선 타인으로 만난 그들은 그렇게 서로에게 `가족`이라는 기적이 된다.

`와일드 펀치`는 정형화된 가족의 틀을 탈피한 대안적 가족서사, 익숙한 문법에 얽매이지 않는 삐딱한 연애서사, 건전함을 강요하지 않는 색다른 성장서사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 읽는 이에 따라 다층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근래 보기 드문 풍요로운 텍스트다. 자칫 자극적인 눈요깃감으로 그치고 말 사건의 연쇄에 휩쓸리지 않고 독자들이 문학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참된 애도를 체험할 수 있도록 중심을 잃지 않는 태도에서 이 작가의 믿음직한 문학적 소신이 느껴진다.

창비 펴냄, 기준영 지음, 264쪽, 1만1천원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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