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들어온 아들이 늦은 아침까지 침대에서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옆으로 비집고 들어가서 같이 누워본다. 아들을 안아봤다. 그리고 뺨을 비볐다. 잠결인 듯 싶던 아들이 정색을 하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더니 침대 밖으로 손살 같이 뛰쳐나갔다. 아빠, 이러지 마세요.
옛날, 저들이 어렸을 때이긴 하지만 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세상이 갑자기 시곗바늘을 몇 바퀴 더 돌려버린 듯하다. 적어도 신체적 접촉에 있어서는. 아버지가 아들의 몸을 더듬는 애정 표시가 그렇게 기분 나빴다면, 요즘 아이들끼리 문제가 되는 동급생 간의 폭력이나 성희롱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될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교 폭력이 사회 문제가 되고 십대 청소년들의 자살이 국가적 이슈가 됐다. 그 중요 원인으로 가족 간 소통이 또다시 도마에 올랐다. 많은 청소년들이 고민을 부모님에게 털어놓기보다는 친구들과 상의하기를 편안해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또 부모님과의 대화 시간이 없다는 것이 청소년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특히 아버지는 자녀들과의 대화 시간이 거의 없다는 사회 통념을 여러 가지 조사와 연구들이 뒷받침해준다.
처음이 아니다. 옛날에도 그랬다. 아이들이 자랄 때 일부러 대화를 시도해 봤다. 그러면 “아빠, 갑자기 왜 그러세요?”라는 시큰둥한, 때로는 귀찮다는 응답이 돌아오기도 했다. 관심사가 다르고 같은 어휘라도 함의가 다르니 부자간 대화에서도 통역이 필요할 지경이었다. 화제의 공통분모가 다르니 내가 싫어하는 일과 아들이 하고 싶은 일이 다른 것이다.
이번 사건의 발단도 그랬다. 집을 떠나 객지생활을 하다 보니 주말이 돼야 집으로 돌아가게 됐다. 나는 주말이 돼야 보는 아들이 반가워 주말 저녁은 되도록 약속도 만들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아들은 주말 집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밖으로 나가기 일쑤다. 약속이 있다는 거다. 그리고는 밤늦게야 돌아오고, 한 주일에 한 번 보는 가족이지만 이렇게 얼굴 보기도 힘들구나 싶었다. 그래서 잠자는 아들에게 나름 애정 표현을 했던 것이다. 그 서툴고 부자연스러운 동작이 아들의 신경을 거슬렸던 모양이다. 그래도 야속하기는 마찬가지다.
시간이 나면 노모를 찾아간다. 여든이 넘어서도 혼자 끼니를 해결하시는 어머니는 여간 안쓰럽고 죄송스러운 게 아니다. 그런 어머니에게는 자식이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자식일 뿐이다. 그래서 제일 먼저 챙기는 것이 `식사`다. 그리고 그 자식에게 식사를 챙겨 주는 것이 하나의 기쁨으로 보인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어머니는 아들과 식사를 같이하거나 아들이 밥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뻐하시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아내에게는 불만이다. 젊은 여자도 자기 끼니가 귀찮아서 외식하는 판인데 노인에게 끼니를 맡기는 것은 자식의 도리가 아니라고 고집한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갈 때면 되도록 식사 시간을 피한다. 그러나 나는 모른다. 그것이 설거지 등 뒤치다꺼리 때문인지, 또는 다른 이유가 있는지.
최근 며느리를 본 동창생은 그랬다. 아들이 안부 전화를 걸어올 때면 꼭 회사나 집 밖에 나와서 한다고. 그러자 옆의 다른 동창이 “아들 내외의 평화를 위한다면 되도록 전화를 하지도 받지도 말아야 한다더라”고 거든다. 특히 며느리가 듣는 전화는 내용을 불문하고 하지 말라는 충고다.
어저께가 어린이날이고 내일은 어버이날이다. 그래서 5월은 가정의 달이라 그랬다. 앞으로는 1인 가정이 대세라는데, 그때는 이런 갈등도 그만큼 줄어들겠지. 가정의 달, 아버지 노릇도 아들 노릇도 힘든 중년 남자의 푸념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