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끝은 어디인가. 읽을수록 새 맛이 나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그린 학문의 깊이에 끝없이 빨려 들어간다.
송나라 제 1시인으로 꼽히며 당송시대 8대가에 이름을 올린 소동파(蘇東坡·본명 蘇軾·1036~1101)의 출생지(四川省)와 문학적 고향을 몇 차례 여행한 적이 있었다. 20대 초에 지금으로 말하면 문과고시에 패스한 공의 문장은 대를 이어 전해진다. 44살 때에 독서가 만권에 이르러도 율(律)서는 읽지 않는다고 말했던 필화(筆禍)사건은 중국역사에 올랐을 정도로 유명하다.
극한을 오가는 굴곡과 부침의 운명, 삶과 관운의 허망함을 눈밭에 찍힌 기러기 발자국에 비유했던 소동파는 미식가로도 별호가 붙었다.
중국에서조차 대표작이 된 적벽부(赤壁賦)를 읽은 사람은 거의 없고 `동파육`이 더 유명하게 비칠 만큼 돼지고기를 즐겨 먹었다.
소동파는 차(茶)에 대한 미각도 뛰어나 그의 시(詩)속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차가`보이차`다 라고 예찬했다. “자고로 좋은 차는 가인(미인)과 같다!”고 보이차를 한없이 치켜세웠다.
적벽부는 역사를 얘기하는 듯 보이지만 자연에 더 감복하고 무위 사상에 닿은 시(詩)로도 해석된다. 비탄조로 끝나는 시가 유독 많은 것은 그가 처한 환경 때문이다.
요즘 항저우나 쓰찬성 시골 음식점에서 나온 동파육은 솔직히 말해서 삼겹살을 그냥 쩌 낸 것이어서 특별한 음식은 아니었다.`돼지비계 맛을 알면 비로소 중국의 맛을 아는 것`이라고 한다.
푹 삶아서 입에 한입 가득 넣으면 바로 녹을 정도로 부드럽게 묘사 되었지만 이방인에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쫄깃쫄깃한 그 껍질 맛을 제대로 느끼도록 하고 비계의 고소함이 입안에서 가득 느껴지되 소홍주를 흩뿌려 느끼하지 않게 하는 맛을 내야만 일품 동파육이라고 중국인 가이드가 덧붙였다.
사실 중국에서는 `고기`는 무조건 `돼지고기`다. 그래서 돼지고기는 육(肉)으로 쓰고 쇠고기(牛肉) 양고기(羊肉)는 따로 쓸 정도다. BC 6000년경부터 중국은 돼지를 가축으로 키웠다. 중국의 1인당 돼지고기 소비량은 무려 37.5kg(2006년 식육편람)이지만 쇠고기는 5.4kg에 불과하다.
한국은 소 19.6kg, 돼지 17.4kg이다. 일본 19.2kg과 6.6kg과 비교하면 뚜렷하게 소비격차가 나타난다.
중국에서는 오죽하면 돼지고기와 곡식이 천하를 편안하게 한다.(猪糧安天下)고 했을 까. 야사에서 나온 말일 것 같다. 당시 생겨난 맹목이라는 말의 어원은 소동파가 기산(箕山)에 살 때에 하양의 돼지고기가 맛좋다는 소문을 듣고 하인에게 몇 마리 가져오게 했는데 하인이 도중에 잃어버렸다. 하인이 다른 돼지로 요리를 했지만 그 이름에 눈멀어 모든 사람들이 맛이 너무 좋다고 극찬했으나 곧 사실이 밝혀졌다. 맹목의 어원이다.
소동파는 1079년 43살이던 해 왕안석(1021~1086·실용주의 학자)에 맞서다 어사대의 감옥에 갇혀 무서운 체형을 받았을 때다. 아들 소매와 암호를 정하고 바깥이 평온하면 야채와 고기 요리, 죽을 시기가 되면 물고기 요리를 들여보내기로 했다.
어느 날 심부름하는 친척이 실수로 물고기 요리가 들여보내지자 소동파는 저 유명한 절명시를 남겼다. 그는 136일간의 옥살이를 끝내고 나와서는 “세상의 일은 한바탕 큰 꿈이니 인생은 얼마나 처량하던가”라는 말을 남기고 낙천주의자의 삶을 시작했다. 시련이 소동파를 변화시켰다.
36세 이후부터는 자의 타의로 귀양살이를 자주 하는 등 삶은 평탄치 않았고 오히려 불행했다. 동파거사는 필화로 귀양살이까지 했으나 여전히 책을 사랑했다. “사람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종일 써도 닳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게 오직 하나있으니 바로 책이다”라고 했다. 사실 보석은 보기엔 즐거우나 실생활엔 쓸데가 별로 없고 집·음식은 긴요하게 쓰는 물건이지만 닳고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