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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페이지에 하나씩 등장하는 죽음

윤희정기자
등록일 2012-08-17 21:03 게재일 2012-08-17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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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페이지에 죽음 하나`  문학동네 펴냄, 220쪽 다니엘 포르 지음, 박명숙 번역

단 한 줄의 문안, 단 한 컷의 이미지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하는 광고, 그 광고를 만드는 사람이 소설을 쓴다면 어떤 느낌일까.

국제적인 광고회사 M&C Saatchi.GAD를 설립한 다니엘 포르의 첫 소설 `한 페이지에 죽음 하나`(문학동네)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넘치는 유머와 활기, 때론 통찰력까지 엿보이는 감각적인 문장들을 만날 수 있을 테니. 제목 그대로 `죽음`이 한 페이지에 하나씩 등장하는, 기발하고 매력적인 작품이다.

한 남자가 처절한 이별 통보를 받는다. 그의 여자친구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에다 실패작이라며 가시 같은 말을 쏟아내고 그의 등 뒤에 겨드랑이 좀 씻고 다니라는 애정 어린 충고도 보탠다. 약속이라도 한 듯 하필이면 그때 건물 관리인이 지나가고, 조롱과 빈정거림이 섞인 안타까운 시선을 던진다. 이름도, 직업도, 나이도 뚜렷하지 않은 이 남자에 대해 지금 당장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사실 여자친구의 말이 크게 틀리지 않다는 것쯤은 금세 눈치챌 수 있다. 지금으로선 평균이거나 평균에 아주 조금 못 미치는 삼사십대 남성으로 추측할 뿐.

쓰라린 실연의 상처를 안고 여자친구의 집에서 나오면서 그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 자동차 사고를 목격한다. 자동차는 그가 불과 십 초 전 서 있던 자리를 들이받고, 차 밖으로 튕겨나간 운전자는 토마토처럼 찌그러졌다. 그는 스스로 운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바로 그 순간부터 자신의 불운이 시작된 줄은.

▲ 온갖 종류의 동식물까지 주인공 주변에 죽임이 이어진다. 우측 위는 저자 다니엘 포르.

자기 연민에 허덕이거나 `실연남` 특유의 비분강개하는 허세를 부릴 법도 하지만, 예상 밖에 그는 맥주 한 잔으로 털고 일어나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노력한다. 다시 사랑에 빠지기 위해 여자를 만나고, 베스트셀러 소설을 써서 유명해지기 위해 열심히 영감을 떠올리고, 몸짱이 되기 위해 부지런히 운동을 한다. 그러나 모든 게 계획처럼, 마음처럼 쉬울 리 없다. 그의 노력에는 늘 2퍼센트가 부족하다. 계획은 실패의 연속이다. 게다가 자동차 사고를 목격한 후로 그의 일상에 `죽음`이, `한 페이지에 하나씩` 계속해서 가로놓인다. 아버지가 죽고, 옛 애인이 죽고, 키우던 화분이 죽고, 급기야 연쇄 살인 사건에 연루되기까지….

소설 속 인물들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주인공의 주변에 죽음이 잇따른다. 주변 인물들이 죽거나, 주인공이 직접 죽음을 목격하지 않더라도 그의 곁에 늘 죽음에 대한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죽음들은 이런 실질적인 죽음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 아이디어, 자본주의, 과거의 나 등 관념적인 죽음까지 함께 이야기하고 있어 작품에 깊이를 더한다.

말 그대로 한 페이지에 하나씩, 실질적인 죽음에서 상징적인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두 150번이 넘는 `죽음`이 작품 곳곳에 배치되지만, 이 소설은 일반적인 스릴러소설과는 거리가 멀다. 여자친구에게 버림받고 더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의 일상에 수많은 죽음이 개입하고, 그로 인해 복잡해지는 사건들이 다니엘 포르 특유의 유머와 한데 어우러진다. 이름이나 직업, 나이조차 뚜렷하지 않은 이 소설의 주인공은 `지금-여기`를 사는 현대 남성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하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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