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통찰력에 동의하는 편이다. 그래서 역사는 반복되기보다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이라는 앨빈 토플러의 말을 더욱 신뢰한다.
가을 햇살이 하도 좋아 동네 공원에 나갔다. 아이를 데리고 휴일 한 때를 보내러 나온 젊은 부부의 행복해하는 모습에서 우리나라를 다시 본다. 언제 이렇게 신나는 대한민국이었던가 새삼 주위를 돌아보게 된 것이다. 그들의 자녀 사랑에서, 공원을 찾은 수많은 시민들의 시선쯤은 아랑곳 않는 그들 부부의 깊숙한 애정 표현을 보면서 세상이 이렇게 변하는구나 충격을 먹었다.
5·16이 정권을 빼앗은 군사쿠데타냐, 위기의 나라를 구한 혁명이냐를 놓고 유력 대선주자인 여당 후보를 코너로 몰아넣어 항복을 받아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추석을 앞둔 2주 전 기자회견을 열어 “정치에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음은 과거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래야 할 민주주의의 가치”라며 “그런 점에서 5·16,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며 관련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사과했다. `인혁당 사건`과 관련, `2개의 판결` 발언으로 논란을 빚은 지 2주 만이다.
박 후보의 발언을 놓고 정치권에서는 대체로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고 진정성 논란이 없는 것도 아니다. 회견 뒤 질문을 받지 않았다던지, 그러고는 당일 부산으로 내려가서 말춤을 췄다든지, 실천이 중요한 만큼 아직 지켜봐야 한다는 반응들이 그것이다. 하나의 사실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견해. 그 진정성을 놓고 치명적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싸이의 말춤이 서울 광장을 메운 8만 관중을 흥분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냥 TV로 보는데도 그야말로 장관이다. 그러나 내 청각에 문제가 있는지 내 구닥다리 브라운관이 성능이 나빠서인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단지 학교와 학원과 집을 개미 쳇바퀴 돌듯 반복해야 하는 입시생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공간으로 맞춤해 보인다. 상사의 잔소리와 끊임없는 업무량에 짓눌려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직장인의 답답한 가슴을 뻥 뚫어주는 시간인 듯도 하다. 싸이의 공연은 모든 답답한 사람들의 숨통을 틔워주는 굴뚝 청소부처럼 시원하다. 같이 소리 지르고 발을 구르고 손을 멋대로 흔들어대는 그 난장판속에 대리만족을 넘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싸이의 공연이고 말춤인 것처럼 느껴진다.
옛날에도 대중음악엔 영웅이 있었다. 그러나 그 방식이 달랐다.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라도 리듬도 멜로디도 다르고 무엇보다 내용을 표현하는 방식이 달랐다. 남진이나 나훈아, 조용필도 팬들을 `뻑` 가게 만들었던 자신들의 시절이 있었고 거기에는 자신들만의 카리스마와 무대 매너가 있었다. 시절마다 그 때에 어울리는 음악이 있었고 또 그 표현 양식이 있었다는 말이다. 싸이의 음악이 세계를 휩쓸고 빌보드를 석권하더라도, 더 커 보이더라도, 그렇다고 더 위대한 것은 아니다.
인사하는 법도 세월에 따라 다르다. 사랑하는 법도 변한다. 사랑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방법이 달라진다고 존경의 마음이 더 커진다거나 높아진다거나 많아진다고 할 수도 없다. 그냥 세상이 변해 보이는 것일 뿐이다. 과거사를 사과한다고, 표현이 반드시 마음 속 생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도 아닐테고 더구나 사람은 더욱 그런 게 아닐 것이다. 박근혜는 박근혜다. 시절이 박근혜를 받아들이고 않고는 유권자 개개인의 취향이거나 호불호이거나 또는 사상이거나 상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