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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냉혹함… 그래도 희망은 있다

윤희정기자
등록일 2013-01-04 00:18 게재일 2013-01-04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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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희망이 외롭다`  김승희 지음,  문학동네 펴냄, 152쪽

쇄빙의 아침이다

오늘 하루도 얼음장을 깨고 쇄빙의 시간 속으로 나간다

갈비뼈 있는 데서 피가 흐른다

쇄빙의 칼날 밑에 오늘도 네 사람의 학생과

한 사람의 교수가 자살했다

면류관 같은 얼음칼이 쇄골에 쿡쿡 박힌다

속이 차디찬 사과의 반쪽이 떨어져 있다

차바퀴가 하얀 사과의 속살을 뭉개고 지나간다

반쪽 가슴의 사과는 아프다

조간신문이 내 골 속에 떨어진다

돈 돈 돈…. 하고 우르르 몰려간다

나는 시인이다

연탄재를 버리려고

연탄집게를 들고 영동대로에 서 있다

버릴 곳이 없다

얼어붙은 입이 자꾸 구겨지며 피가 터진다

-`서울의 우울 3` 부분

시인이자 소설가로, 또한 대학에서 국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활동하는 김승희(60)의 아홉번째 시집 `희망이 외롭다`(문학동네)가 출간됐다.

전작 `냄비는 둥둥`이후 6년 만에 펴낸 시집이라 반가움이 큰 이번 시집은 시단에 나온 지 꼬박 40년을 채워가는 시점에 출간된 시집이라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남다르다.

사변적이거나 페미니즘적인 시가 아닌 현실과 문명에 대한 강렬한 비판을 담은 시로 동시대 여성 시인들과 구별되며 현대시사에 확고한 자신의 자리를 마련한 시인 김승희가 아홉번째로 펴내는 화사하고 아름다운 핑크색 시집에 담긴 키워드는 다름 아닌 `희망`이다.

그러나 그 단어가 품고 있는 절실한 바람과 달리 작금의 현실에서 핑크빛 미래를 꿈꾸기는 쉽지가 않다. 그리하여 그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외롭다`.

`이번 시집에는 연작시들이 많아 시선을 끈다. 그중에서도 2부의 주를 이루고 있는 `서울의 우울` 연작은 날카로운 현실 분석과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연민 가득한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시인 김승희의 눈과 가슴에 맺히는 사건은 무엇보다 죽음이다.

잘못도 없이 죽임을 당하거나, 마찬가지로 죽음으로 내몰린, 하여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러나 어느새 아무 일 없는 듯 묻혀버린 장자연에 대해 쓸 때에는 “황폐한 도성에서 죽어가는 어린 것들을 보며 창자가 찢어지고 피가 끓는 극한 고통을 느꼈던 예레미야의 탄식이 이 시집에 황혼처럼 내려앉아 있”(허윤진)는 듯하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까. 연탄집게를 든 초라한 모습으로 대로에서 할 일을, 갈 곳을 잃고 만 시인의 등에 대고 살며시 묻는다.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폐허에서 쓰러지기 직전에 가끔은 말의 에피파니(epiphany)를 꿈꾸기도 했다. 신은 시인에게 언어와 언어의 꿈을 주었기에. 결국은 말의 에피파니가 부서진 세계와 영혼의 병을 구원하는 것일까? 거기에 그리움이 있었고, 희망의 빈혈로 너무 아플 때면 우리말을 부여잡고 우리말에 기대어 울어보기도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얼어붙고 어두운 세상에서 불안과 죽음들이 빚어놓은 비극을 목격한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언어에 기대어 울어보는 일. 그렇게 `희망`을 조심스럽게 꺼내보는 일을 테다.

1부를 수놓고 있는 `~라는 말`로 표현된 제목의 시들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인이 담아내는 `하물며` `부디` `아직` `이미` `어쨌든` `비로소` `아랑곳없이` `저기요` `아~` 등의 말은 문장에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지만 적절한 활기를 부여하며 의미를 풍성하게 하기 위한 부사와 감탄사이다.

이번 시집의 해설은 맡은 허윤진은 “명사와 형용사보다는 동사와 부사가 언어의 정취를 결정하는 한국어의 세계에서 부사는 동사를 단장하는 마지막 손길 같은 것”이라고 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현실의 냉혹함. 그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시인의 절박함이 이끌어낸 언어들. 그리하여 간신히, 희망을 희망해보는 오늘. “오히려 그 희망 때문에/ 무섭도록 더 외로운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시인은 “도망치고 싶고 그만두고 싶어도/ 이유 없이 나누어주는 저 찬란한 햇빛, 아까워/ 물에 피가 번지듯…. / 희망과 나,/ 희망은 종신형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어쩔 수 없이, “희망이 외롭다”(`희망이 외롭다 1`).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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