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런데` 박순원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144쪽<br>가고 싶은 쪽으로 말머리 돌려… `그리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br>웃음과 슬픔으로 섬세하게 묘사<br>독자에 진한 페이소스 느끼게 해
“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마치 찰흙을 가지고 노는 일처럼 즐겁고 신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박순원 시인.
2005년 `서정시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하고 시집 `아무나 사랑하지 않겠다`와 `주먹이 운다`를 발표한 시인의 세 번째 시집 `그런데 그런데`(실천문학사)가 출간됐다. 웃음과 슬픔으로 섬세하게 그려진 그의 이번 시집을 통해 독자들은 진한 페이소스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데가 좋다 그리고도 그렇고 그러나도 그저 그렇고 그러므로는 딱 질색이다 (….) 순딩이 같은 그리고는 개성이 없다 그러나는 까칠하다 그러므로는 고지식하다 그러니까는 촌스럽다 특히 끝의 두 글자 니까가 마음에 안 든다 그런데는 두루뭉술하면서도 날렵하게 빠져 다닌다 그랜저 같다 그런데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런데 말이지 천연덕스럽게 자기가 가고 싶은 쪽으로 말머리를 돌린다 그러므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
시 `아라비안나이트` 부분
둥글어서 슬픈 세계가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 중에 하나인 `그런데`. 시인이 말하듯 `그런데`는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이야기해오던 것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한 번에 들었다 놨다 할 수 있고, 한 번에 뒤집어버릴 수 있는 힘이 바로 이 `그런데`라는 말에 있다. 누군가는 불리한 입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런….”라고 말을 돌리고, 또 누군가는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런데!”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때로는 “그런데 말이야” 하고 팍팍한 삶의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숨구멍을 뚫어놓는다.
`그런데`라는 말은 매우 유연하게 빠져 나가면서도 뒤따라올 말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한다. 시인이 말하듯 저 유명한 `아라비안나이트`도 결국 `그런데의 세계`다. 아무 할 말이 없는 사람은 “그런데”라고 말하지 못한다. 자신의 주장이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 이른 아침 아내가 배춧국을 끓인다 배추는 이른 아침부터 불려 나와 끓는 물속에서 몸을 데치고 있다 배추는 무슨 죄인가 배추는 술담배도 안 하고 정직하게 자라났을 뿐인데 배추에 눈망울이 있었다면 아내가 쉽게 배춧국을 끓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 그래 나도 눈망울을 갖자 슬픈 눈망울 그러면 이른 아침부터 불려 나가 몸이 데쳐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_
시 `이른 아침` 부분
시집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여러 번 웃게 되는데 그중 한 장면이다. 시 `이른 아침`에서 시인은 슬픈 눈망울이 있다면 아침부터 배추가 끓는 물에 데쳐지지는 않았을 것이라 가정하며, 일찍 데쳐지지 않기 위해서 슬픈 눈망울을 짓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시인은 저 옛날 군사독재 시절 대통령을 위해 천삼백원을 내고 국가가 보조해주는 복장을 구입해 소년체전 기념 “마스게임”을 준비하면서부터(`마스게임`), 최근에 이르러서는 회사 사장에게 “말대답도 안 하고 불쌍한 척” 가만히 있는 것에서(`멧새 소리`) 본능적으로 “슬픈 눈망울”을 가지는 연습을 하고 있다.
시인은 “주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일부러 낑낑거리며” 살아가는 소시민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크게 한번 몸을 뒤트는” 연포탕에 든 낙지와 목줄에 묶인 강아지를 통해 읽는다. 그들의 단념을, 그 처참한 기분을,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는 풍경을 통해 스리슬쩍 그려내고 있다. 시인의 목소리에서 투사의 결기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지만, 대신 투창보다 예리하게 연마된 눈빛이 서려 있다. 그 눈빛에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는 단호함이 있다.
시인은 재밌는 상상력으로 비천해 보이는 것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기도 한다. 그 모습은 웃음을 주는 동시에 슬픔을 형상화한다. 그런 사물들 중에는 “불 밝히는 일 딱 한 가지 일만 하다가 끊어지면 끊어져서 덜렁거리면 유리와 함께 버려지는”(`필라멘트`) 필라멘트, “아무것도 아니니까 (….) 뻥뻥 걷어찰 수 있는”(`축구공`) 축구공이 있다. 시인은 이처럼 사소하기 때문에 버려지는 것들, 아무것도 아니니까 걷어찰 수 있는 것들의 고귀한 의미를 되새긴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 담긴 왁자한 웃음을 통해 이 세상을 한번 실컷 들었다가 내려놓는다. 그가 세상을 들었다 놓는 팔뚝에는 두꺼운 근육 대신 유쾌한 웃음이 묻어 있다. 그 웃음소리는 `그러니까`에 길들여지지 않는, `그러므로`에 순응하지 않는, `그러나`에 따귀 맞지 않는, `그리고`에 목 눌리지 않는 신비스런 힘이 있다. 시인은 그 비밀을 들려주기 위해 조용히 속삭인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