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운동이 일어난지 30여년 만에 우리는 나라를 되찾았고, 또 6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그동안 우리나라는 어려움을 딛고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포항에서도 3·1절이면 민관에서 갖가지 행사가 열린다. 3·1만세운동은 서울이나 몇몇 도시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고, `무슨 역사가 있느냐`는 자조 섞인 비평을 듣기도 하는 포항에서도 크게 일어났었다.
요즈음 유관순 열사의 키 논쟁이 뜨겁다. 남아 있는 것은 그 당시 감옥에서의 사진과 기록인데, 5척 6촌이냐, 5척 0촌이냐가 그 논쟁의 중심에 있다.
한 미술생리학자에 따르면, 그 당시 여고생의 키가 150㎝ 정도였으므로 유관순 열사의 키가 169.7㎝의 장신이기 보다는 151.5㎝가 맞고, 5척 6촌의 글자 중 0자를 6자 같이 쓴 것이 오해의 소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천안지역의 한 향토사학자는 6을 0으로 볼 이유가 없다는 반론도 제기하고 있다.
필자는 인터넷을 통해서 그 당시의 기록을 사진으로 보았을 뿐이지만, 5척 6촌 글자가 분명한데 이를 왜 5척 0촌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당시 기록자의 습관이 0을 6같이 썼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 당시가 지금부터 90여년전 일제시대의 기록이라 해도, 그 당시의 행정체계가 지금 일부 인사들이 생각하듯 그리 허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휘갈겨 썼다 해도 0자가 6자로 보여 오해를 일으킬 정도를 그냥 둘 만큼 엉터리 체계는 아니었을 것이다.
일제, 생각해보자. 1800년대 중후반, 우리 조선이 당쟁에 휘말리고, 외세에 흔들리고, 국민들이 가난과 무지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할 때, 이들은 조선정벌을 체계적으로 논하고 있었다.
만주 `광개토대왕 비문`을 젊은 일본군 소위가 해독하고 일본에 유리하도록 고쳤을 정도로 문과 무를 갖추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더 해서 무엇하랴마는, 그 당시 일본과 한국은 그 차이가 너무나 컸다. 그래서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 아니던가 싶다.
일부 논객들은 유관순 열사의 키가 169.7㎝든 151.5㎝든 그게 업적에 무슨 상관이 있느냐 주장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반성해야 할 것은 우리들이 너무 과거를 쉽게 잊고 기록도 제대로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욱`하며 분기탱천하는 경우가 많지만, 중요한 일들도 곧바로 망각해 버리는 습관이 있다.
이게 장점으로 작동해 신바람이 될 수도 있지만, 과거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고 현재나 미래를 과거를 바탕으로 실수 없이 계획하는 습관이 매우 모자란 것을 지적하고 싶다.
필자는 전공상 과거 30~40년전의 산업단지 개발, 신도시 개발 등에 관한 자료들을 모아 본적이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활용 가능한 문서들이 거의 없었다. 일부 단편적인 신문기사와 `카더라` 전설들만이 전해져 올 뿐이었다.
유관순 열사에 관한 신상기록만 해도, 얼마 전 형제자매며 친구들이 생존해 있었으니 어느 정도 고증해 놓을 수 있었다고 본다.
이처럼 근현대의 역사적인 사실과 유물들이 치밀한 고증과 기록 없이 잊혀져가고 사라져 가는 게 안타깝다.
이 기회에 포항시에도 산재한 3·1운동 및 의병활동 기념물들을 한데 모아 사료들을 갖춘 기념관 및 기념공원으로 조성하면 어떨까 싶다.
지금부터라도 지역의 잊혀진 사료들을 좀 더 충실히 찾아내고,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연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