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인시공` 정수복 지음 문학동네 펴냄, 300쪽
`파리를 생각한다` `파리의 장소들`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 등으로 이어지는 저서에서 에세이와 인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파리와 프로방스의 골목에 숨어 있는 `사색과 영감의 장소`들로 독자들을 이끌었던 사회학자이자 작가 정수복이 신작을 펴냈다.
그가 이번에 걸어들어간 곳은 특정 도시나 마을이 아닌 `책과 독서가들이 있는 시간과 공간`이다.
그에게 독서란 단지 `발`을 움직이지 않을 뿐, 언제나 `지금-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 새로운 풍경과 사람들을 만나는 또다른 의미의 `산책`이었다. 그는 산책할 때마다 늘 가방 속에 책을 넣고 다녔고, 그가 산책하는 곳에는 늘 책과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의 산문집 `책인시공`은 여러 사람들이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다양한 책을 읽는 각양각색의 모습을 통해 책과 사람 사이의 아름다운 관계를 그려 보인다. 여기에는 이름이 잘 알려진 작가와 유명인들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자기만의 시공간에 책을 들고 등장해 고유한 풍경으로 피어난다.
침대에서, 버스에서, 전철에서, 도서관에서, 서점에서, 거리에서, 공원에서, 그리고 아침, 한낮, 저녁, 밤 시간에 관계없이, 어려서나 청춘일 때나 늙어서나,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견디고 즐기며 자기만의 내면 공간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산책자 정수복이 문장으로 그려낸 독서가들의 초상, 그리고 사람과 책이 한곳에 아름답게 어우러진 일상의 풍경화들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이 책은 `독자 권리 장전`이라는 글로 시작한다. `책 읽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인권 선언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17가지의 항목들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은 언제나, 어디서나, 마음 내키는 대로, 그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조차 쉴 새 없이 휴대폰 벨이 울리고,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죽은 시간`으로 여기며 끝없이 삶의 여백을 지워나가는 이 세계에서, 어쩌면 아무런 방해 없이 책 읽기에 좋은 시간과 장소가 주어지길 기대하는 것은 무모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에서 저자는 지금 당신이 서 있는 바로 그곳을 `서재`로 바꾸고, 일상의 빈틈을 독서시간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삶 속에 숨어 있는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 들을 하나하나 펼쳐 보인다.
황인숙의 옥탑방, 정혜윤의 침대, 안토니오 그람시의 감옥, 장정일의 기차, 로쟈 이현우의 버스….
이곳들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공간, 혹은 책 읽기에 지독히 부적절한 공간처럼 보이지만, 비범한 독서가와 작가 들은 자신이 서 있는 곳을 금세 서재로 만들어, 언제 어디서나 거리낌 없이 책을 꺼내든다. 정수복의 책이 특별한 것은 지금껏 책에 관해 이야기할 때 거의 다루지 않았던 `독서가들의 시간과 장소`가 책에 관한 논의의 전면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