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푸집 연주` 김정환 지음 창비 펴냄, 160쪽
시·소설·평론 등 문학 장르 외에도 역사·음악·미술·인문 등 문화예술의 다양한 분야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다산성의 상징`이라 불릴 만큼 전방위적 글쓰기를 해온 김정환 시인의 신작 시집 `거푸집 연주`(창비)가 출간됐다.
최근 4년간에 걸쳐 완결한 `전작 장시 3부작`을 빼면 `레닌의 노래` 이후 7년 만에 펴내는 시집이다.
전체 4부로 구성된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지나온 세월, 20세기의 시대정신에 대한 성찰과 모색을 통해 삶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서로 교감하고 소통하는 “다정하고 슬프고 강건한 아포리즘”(진은영, 추천사)의 시세계를 펼쳐 보인다.
시집 전반에 걸쳐 선명하게 드러나는 폭넓은 지식의 깊이와 특히 `늙은 몸`의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과 사유가 묵직한 울림을 선사한다.
연작시 `다시 읽는 지구 위의 생물`과 `전집의 역전` 등에서 보이는 독특한 형식과 행갈이의 파격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이제는 너를 향한 절규 아니라/이제는 목전의 전율의/획일적 이빨 아니라/이제는 울부짖는 환호하는/발산 아니라 웃는 죽음의 입 아니라 해방 아니라/너는 네가 아니라/내 고막에 묻은 작년 매미 울음의/전면적, 거울 아니라/나의 몸 드러낼 뿐 아니라, 연주가 작곡뿐 아니라/음악의 몸일 때/피아노를 치지 않고 피아노가 치는 것보다 더 들어와 있는 내 귀로 들어오지 않고 내 귀가 들어오는 것보다 더 들어와 있는/너는 나의/연주다.//민주주의여.” (`서시`전문)
평론가 황현산이 해설 서두에서 “죽음의 시집”이라고 말했듯, 이번 시집에서는 유독 `죽음`에 대한 시인의 오랜 성찰이 두드러진다.
연작시 `이것들이 인간 죽음에 간섭`을 비롯해 `국광(國光)과 정전(停電)` `장모 승천`이 그러하며 연작시 `전집의 역전`에서 불러내는 인물들도 아일랜드의 시인 셰이머스 히니를 제외하면 로르카, 아흐마토바, 실비아 플라스, 박완서, 김근태, 김대중 등 모두 저세상 사람들이다.
다른 시라고 해서 죽음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시편에서 `죽음`이라는 단어가 도드라진다.
시인은 특히 `이것들이 인간 죽음에 간섭`에서 `모기` `거미` `간장게장 게`의 입을 통해 또 `LP 음반` `수의 역사` `매김씨` `늙은 몸`에 비춰 죽음의 여러 양상들을 묘사하며 그 자신의 죽음을 “일종의 구원처럼” 혹은 “가장 신뢰해야 할 전망처럼 암시”(황현산, 해설)하면서 “죽음을 능가하는 죽음”(`여성 모델의 언어`)을 통해 오히려 삶의 명징성을 깨닫는다. 시인은 또 “죽음이란 살아온 생 거슬러/걸어가는 것”(`선물과 명작`)이라고 말한다.
세칭 `전방위 예술가`로서 특히 클래식 평론가로도 정평이 나 있는 김정환 시인에게 `음악`은 하나의 예술 장르로서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종합”(해설)이자 “만국 공통 언어”(`폭설의 아내, 안팎과 그후`)로서 포괄적인 상징어로 쓰인다.
“어둠과 음악이 서로를/육체적으로 탐하는 죽음”(`전집의 역전`)에서 드러나듯 시인은 죽음이 음악으로, 음악이 죽음으로 느껴지는 어떠한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내 이빨은 하루 종일 달그락대며 바야흐로/무너지는 중이지만/내 귀의 나이는 뭔가 긁히는 잡음까지 걸러낸다”는 시인은 “`음반=음악=평면=세계`”(`이것들이 인간 죽음에 간섭`)로 보기도 한다.
시 `음악의 세계사 그후`에서 시인은 고전음악의 거장들의 생애와 그 뒷이야기를 한편 한편의 시로 형상화해 연주하듯 들려준다.
김정환 시인은 또 번역가로서도 탁월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이미 `셰익스피어 전집`(40권)을 번역 중인 시인은 최근에는 5개 언어권 12명 시인의 시전집을 혼자서 완역하는 작업에 돌입하는 괴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 과정에서 발상을 얻은 시 `전집의 역전`에서 시인은 “폴란드어 낱말/하나하나 번역하다가 음악과 미술이 만국 공통 언어이듯/시는 만국 언어 공통의 문법”(`폭설의 아내, 안팎과 그후`)이라는 깨달음 속에서 세계적인 시인들의 위대한 시정신과 그들의 전생애에 걸친 삶과 고뇌의 흔적들을 선명한 이미지와 감성의 언어로 되살려낸다.
아울러 “역사가 내내 비명의 참사인 것에” “평생 울었던” 김근태, “평화와 희망의 이름” 김대중, 죽어서도 “저승의 슬하 쪽을/더 배려하려는 내색으로 유구”한 박완서, “부유한 집 자제로 가산을 가난한 친구들 시집 출판 비용으로/물 쓰듯” 썼던 강태열(시인) 등을 추억하며 기린다.
/윤희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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