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는 노회 시찰 수련회를 소록도로 다녀왔다. 한국과 세계 기독교회 역사를 해박하게 통달하고 다음 세대에 그 역사를 문건으로 남기는 보배로운 사역을 하시는 김재현 박사가 직접 안내를 해 주시면서 소록도 중앙교회를 제일 먼저 방문했다. 천우열 전도사님의 짧은 말씀과 함께 긴 묵상이 시작됐다. 신학교 재학시절 지역교회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그리고 이번에 세 번째 방문해 보는 소록도였지만 그 동안 말씀 사역에 쫓기면서 잠간 마음자리에서 비켜 있었던 소록도의 하나님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감동과 함께 유구무언의 시간이 이어지면서 고뇌 아픔 통렬 감사가 뒤엉킨 회개가 침묵 가운데 진행됐다.
세월이 좋아 소록도에 오기 전에 인터넷과 언론 책자를 통해 소록도의 기본 상식이야 누구나 다 인지하고 오지만 소록도 중앙교회를 담임하시는 천우열 전도사님으로부터 소록도의 고난의 역사를 직접 들으면서 몸이 떨리고 마음이 후들거려 차마 귀로 듣기에는 견뎌내기 힘든 소록도의 처절한 세월이 새삼 온 몸과 마음을 후리는 아픔으로 몸과 마음에 베어들었다.
일제시대에 병들어 소록도에 와서 정관수술을 당하고 식량갈취, 강제노동, 신사참배 강요를 당하면서도 초지일관 하나님만 바라보며 죽음의 고비들을 넘겼다.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을 맞았지만 자치권요구를 위해 협상단이 구성됐다가 84명이 학살당하는 기막힌 일을 당해야 했고 흉골천자 과정, 1950년 공산주의에 의한 인민재판, 1954년 4·6사건의 환란이 연이어 일어났다. 무엇보다도 예배당 전체를 몰수당하는 하늘이 무너지는 큰 고통과 더불어 짐승취급을 겪어야 했던 소록도의 역사는 당하기만 했던 한(恨)을 뛰어넘어 핏빛어린 역사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센병(Leprosy)의 시조가 모세라고(출4:6) 자위하는 소록도의 사람들은 원망 불평 비난 하지 않으면서 시5:15, 약5:13, 시40:1~2, 사48:10, 잠17:3, 시119:71, 살전5:16~18, 시48:14을 뼛속까지 새기면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이겨냈다. 그런데 가장 핵심적인 믿음생활의 메시지가 있었다.
소록도의 하나님을 만나려면 소록도에 와야 하지만 소록도를 찾는 전국 세계 방방곡곡의 사람들 모두가 소록도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소록도에 와서도 다시 `찌라도`까지 가야 비로소 소록도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여러분 여기까지 오시기도 힘든데 다시 저와 함께 `찌라도`까지 갈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참석자들은 그 뜻을 알지 못해 답을 하지 않고 있을 때 나는 이미 그 뜻을 알고 있었기에 앞자리에서 “가야지요”라고 전도사님의 질문에 호응을 했다. 그것은 섬(島)이 아니라 하박국 3:17을 의미하는 것이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소록도의 사람들은 `그 어떤 상황일지라도` 원망 불평 없이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는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소록도의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삶이다. 즉 `찌라도`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정말 행복하고 감사한 것뿐이라는 것이다. 기쁨과 즐거움은 하나님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이 `찌라도`의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전6:6, 욥23:10, 행14:22, 계7:14, 롬12:12을 날마다 노래 부르면서 그 어떤 `찌라도`의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불평 원망하지 않고 살전 5:16~18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올해도 벌써 한해의 반을 넘기고 하반기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된다. 오늘 우리의 상황이 어떤 `찌라도`에 있을지라도 소록도의 성도들처럼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