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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되찾고 상처 치유한 `1천km 순례길`

윤희정기자
등록일 2013-08-16 00:35 게재일 2013-08-16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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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 레이철 조이스 지음 민음사 펴냄, 210쪽

때때로 삶에는 예기치 않은 순간, 인생을 바꿀 순간이 찾아온다. 평생 회사와 집을 오가며 쌀쌀맞은 가족의 시선을 감내하며 살다 은퇴한 외로운 남자 `해럴드`에게도, 언젠가부터 꼬여 버린 삶의 의미를 되찾는 순간이 찾아온다.

오래전부터 준비한 세계 여행이나 우연히 만나 황혼의 사랑을 나누게 된 사람이 가져다준 것이 아니다. 이 평범한 사람의 뒤늦은 오디세이는 사소한 편지 한 장으로부터 시작된다.

`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는 소심한 성격의 60대 은퇴자가 옛 직장 동료에게 편지 한 장을 받은 후, 그녀를 만나기 위해 영국 남부 킹스브리지에서 북부 버윅어폰트위드까지 1천km를 걷게 되면서, 잊고 있었던 인생의 수많은 추억을 되찾는 동시에 자신을 괴롭혔던 힘든 과거를 돌아보며 스스로를 치유하는 이야기이다.

작가 레이철 조이스는 왕립 셰익스피어 극장에서 활동했던 배우 출신으로, 결혼 후 영국 BBC 라디오 극작가로 활발히 활동하다 2012년 첫 소설`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를 발표하며 일약 스타 소설가로 거듭났다.

그녀는 후두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이 소설을 구상했는데, 배우와 극작가로 활동한 이력 덕분에 생생하고 쉬운 언어로 인간의 미묘한 감정과 함께 영국 각 지역의 특징적인 풍경까지 탁월하게 묘사해 냈다.

`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는 출간 즉시 영국 아마존의 판매 순위 상위권에 올랐으며, 그해 브리티시 내셔널 북 어워드의 신인작가상을 수상하고 맨 부커 상 후보에까지 오르는 등 평단과 독자 모두에게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 냈다.

특히 완성도 높은 플롯과 공감 가는 캐릭터, 모두에게 다가갈 수 있는 감동적인 내용으로 호평을 받으며 전 세계 30개국이 넘는 나라에 판권이 팔리는 쾌거를 이뤘다.

작가 폴라 매클레인이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울면서 웃음을 터뜨렸고, 해럴드의 여행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응원했다. 지금도 해럴드를 응원하고 있다`라고 평했듯,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며 `해럴드 프라이`의 순수하고 간절한 행보에 울고 웃었다.

영국 남부 킹스브리지에서 양조 회사 영업 사원으로 성실히 일하다 정년퇴직한 해럴드 프라이.

부인 모린과 그는 20년 전 아들 데이비드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마음을 굳게 닫고 서로를 목석처럼 대하고 있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던 봄날 아침, 모린이 그에게 분홍빛 편지 봉투를 내민다. 양조 회사에 다니던 시절 경리부에서 일했던 퀴니의 편지였다. 오래전 그녀에게 큰 도움을 받고도 고맙다는 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비겁하게 그녀를 떠나보냈던 해럴드. 그녀가 현재 영국 북부 버윅어폰트위드의 한 요양원에 있으며 암에 걸려 많이 아프다는 소식에 놀란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급히 답장을 써서 부치러 나간다. 하지만 황망히 걷다 보니 우체통을 지나치고, 자신도 모르게 그대로 쭉 걸어 나가게 된다. 그것이 이 엉뚱한 여행의 시작이었다.

급하게 편지를 부치러 나오느라 아무렇게나 꿰어 신은 낡은 신발, 집에 두고 나온 핸드폰, 심지어 삐거덕거리는 몸까지…. 해럴드는 킹스브리지 교외로 나오자마자 자신이 불가능한 일을 하려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끼니를 때우러 들어간 주유소 겸 식당의 아르바이트 여학생에게 `믿음`이 있으면 퀴니가 병에서 나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걸어서 그녀에게 편지를 전달하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이 걷고 있는 한 퀴니는 죽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해럴드의 발걸음을 재촉하게 된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인기를 끌고 있는 순례와 걷기 열풍에 이 소설은 몇 가지 생각할 점을 던진다. 해럴드 프라이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순례는 걷겠다고 미리 결심하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발이 먼저 길 앞으로 나아간 다음에야 스스로 그 의미를 깨닫게 되는 행위라는 것을, 또한 순례에는 나침반도, 전문가용 등산화도, 계획적인 루트와 일정 관리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무엇보다 순례는 땅의 울림과 바람의 노랫소리를 느끼며, 무엇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자신의 삶을 자연스레 돌아보는 행위라는 것을.

해럴드가 지나쳐 온 삶에는 행복했던 순간도, 도저히 풀 수 없는 숙제처럼 남아 버린 괴로운 순간들도 있다. 그 모든 삶의 페이지를 다시 넘겨 보며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가까운 이들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 그리고 아무리 어긋나 버린 인생이라도 용기만 있다면 언제든지, 심지어 해럴드처럼 60대 중반의 나이에라도 수정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놀라운 인생의 열쇠가 아닐까.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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