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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독제독

등록일 2013-10-30 00:01 게재일 2013-10-3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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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찬 김천대 교수·임상병리학과

삼성그룹의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이 기업경영의 제1의 지침서로 탐독했던 손자병법에 보면 전쟁에 있어서 최선은 내가 직접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비슷비슷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들간의 전쟁일 경우 싸워보지도 않고 적에게 굴복하는 경우란 매우 드물다. 이럴 때 가장 이로운 방법은 바로 이이제이(以夷制夷)병법이다. 이이제이란 내가 아닌 적군끼리, 즉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의미의 용어다.

군사 용어에 이이제이가 있다면 의학적 용어로 독으로 독을 다스린다는 이독제독(以毒制毒)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당(唐)나라 때 신청(神淸)이 지은 `북산집(北山集)`에 나오는 내용으로 “훌륭한 의사는 독으로써 독성을 멈추게 한다(良醫之家, 以毒止毒也)”라는 글귀에서 유래되었다. 우리 몸에 병을 유발하는 원인 물질을 악(惡)으로 간주 하다면 그 악의 세력을 물리치는 데 또 다른 악을 치료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원래는 전통 한의학에서 질병을 치료하는 한 방법으로, 독성이 함유된 약물로 독창(毒瘡) 등의 악성 질병을 치료할 때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사약의 원료로 쓰였던 부자(附子)가 그 독성을 중화시키는 다른 약물과 적절히 공용하여 신경통이나 류머티즘 관절염 등의 치료제로 사용하는 것도 이독제독의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현대 의학의 가장 큰 숙제는 암(癌), 그리고 바이러스(Virus) 정복이다. 이 둘은 인류 건강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이다. 특히 바이러스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증식할 수 없으며, 동물·식물·세균·방사균 등 살아 있는 세포를 숙주(host)로 이용하여야만 증식할 수 있는 독특한 메커니즘을 지닌 감염성 유해 입자이다. 수년전 전세계를 강타한 신종플루의 공포를 기억할 것이다. 그만큼 바이러스는 치명적이고 위험한 질병 원인물질이다. 그러나 최근 이렇게 위험한 존재인 바이러스가 암 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임상 연구 결과가 연이어 터져 나오면서 최신 첨단의학에서도 바이러스를 이용한 이독제독 치료법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항암 치료 방법을 “바이러스 종양파괴”라고 하는데 특히 바이러스를 이용한 이독제독 치료법의 세계적 선두 그룹이 우리나라 연구진이라는 사실에 다시한번 놀라게 된다.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의 황태호 교수 연구팀은 암세포와 바이러스가 과다 증식하는데 반드시 필요로 하는 TK 유전자를 유전공학 기법으로 적절히 재조합(recombination)한 `우두 바이러스(vaccinia virus)`를 말기 간암 환자들의 암세포 주변에 직접 주사해 보았더니 다량의 바이러스를 주사 받은 환자들의 생존률이 현저히 높아지는 놀라운 임상 결과를 얻었다. 황태호 교수는 지난 20년간 바이러스를 이용해 암을 치료하는 연구에 매진해 왔으며 황교수의 소중한 연구 결과들은 세계적인 의학저널인 네이처 메디슨 (Nature Medicine)을 통하여 최근 전세계에 소개 되었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씀이 있다. 예수그리스도가 인류에게 남긴 마지막 지상명령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자신의 철천지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원수의 곁에 가기도 싫을 것이다. 철학적, 심리학적으로는 도저히 실천 불가능한 명령이지만 의학적 볼 때 매우 큰 의미를 지닌 명령이다. 황 교수의 항암 바이러스의 성공 사례에서 보듯 인류 건강의 적이자 원수인 암세포와 바이러스에 끝없이 관심을 가지고 곁에 두고 사랑하며 지켜보다보니 암세포와 바이러스의 공통적인 성향을 파악하게 되었고 이점을 역으로 이용하여 결국 암을 억제하는 획기적인 이독제독법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누구든 자신의 삶의 공간에서 자신을 힘들게 하는 원수같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때 그들을 무조건 미워하고 배척하기 보다 오히려 그들에게 더 관심을 가지고 살펴서 역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잘 활용하는 것 또한 현대를 살아가는 삶의 지혜가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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