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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추운 이들에게

등록일 2013-12-12 02:01 게재일 2013-12-12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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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겨울 날씨는 변덕스러울 때가 있다. 따뜻해졌는가 하면 금방 다시 추워진다. 눈비가 오면 더욱 그렇다. 오늘 새벽에는 서울에 눈이 꽤 내렸지만 낮이 되자 다 녹고 없다. 하지만 일기예보에 내일은 더 추우리라 한다. 오늘 밤 눈이라도 오면 세상이 꽁꽁 얼 것 같다.

문학잡지 일을 같이 하던 후배가 며칠 있으면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1년을 동고동락했는데, 잡지 운영이 어렵다 보니 출판사에서 인건비부터 줄여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요즘 출판사 경기야 말할 것도 없으니 출판사를 탓할 수만도 없다. 하지만 일로 정든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처럼 마음 아픈 일도 없다. 좀더 버젓하게 일을 만들어가지 못하는 내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뭔가 일을 정식으로 하고 싶어도 문제가 잘 풀리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의욕도 있고 능력도 있고 애도 쓰는데 그에 걸맞은 자리가 주어지지 못한 사람을 보면 세상은 왜 이렇게 부조리한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제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를 만났다. 작년에 하와이에 가서 알게 된 사람, 좋은 후배님이다. 모처럼 한국에 왔다고 이렇게 저렇게 연락이 되어 학교 앞 식당 비슷한 곳에 셋이서 만났다. 인생이 어느 정도 깊어가면 너댓 살 차이는 묻어가는 법이다. 그 자리는 딴 사람이 밥을 사고, 뒤이어 내가 맥주를 사겠다고 독일 맥주를 파는 곳으로 데려 갔다.

셋이서 노란 조명 불빛 아래서 노란 밀맥주를 시켜 놓고 이야기를 나누자니 바깥 날씨와 달리 몸도 마음도 풀어지는 것 같다. 그때 이 후배님이 배낭 가지고 온 것에서 두 번 접힌 흰 8절지를 주섬주섬 꺼낸다. 웬 성명서냐는 듯 궁금해 하는 두 사람에게 이것은 오랜만에 서울로 자기를 찾아오신 아버지께서 직접 써서 주신 것이라 한다.

그러면서 보여준 그 8절지에는 싸인펜으로 먼저 한문이 씌어 있고, 그 아래에 볼펜으로 해석 문장이 씌어 있다.

우리는 노란 불빛에 이 글발을 비추어보며 읽었다. 이는 어느 고전에서 인용해 온 것인데, 그 뜻풀이를 그 어른이 쓰신 그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갈다.

“사람이 이 사람에게 대임을 내리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고달프게 하며

그 근육과 뼈를 수고롭게 하며

그 몸과 살을 주리게 하고

그 몸을 텅 비고 모자라게 하여

행함과 하는 바를 어지럽히지 않는 게 없이 하나니

참는 성질을 충동하여

더욱 못하는 바가 없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이 여덟 줄 문장을 읽어 내려가다 하마트면 내 고질병을 노출할 뻔했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간신히 추스르고 감출 수 있었던 것이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읽고 있는 내 폐부를 찔러 마음을 아프게, 그러나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공부하는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어찌 이보다 더 절실하게 표현할 수 있으련지?

요즘 세상은 가치 있는 일에 몸과 마음을 바치는 사람들이 제값을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 너무 많다. 십 년, 십 오 년 공부를 해도 쓰이지 못할 때 그 쓰린 마음을 어디에 비길 수 있겠는지?

하지만 문제는 공부하는 사람에게만 있지 않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삶에 겨운 이들이 많다.

내가 과연 이 사람들의 사정을, 심경을 얼마나 헤아릴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성원한다. 마음과 뜻이 고달픈 사람들, 몸과 살을 주리고 있는 사람들은 이 죄 많은 세상을 위하여 시련을 앞서서 겪어가는 이들이다. 이 추운 겨울, 우리는 서로 기대어 견딜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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