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감독원장 무리 횡포에 맞서 싸우는데… <Br>`대리석 절벽 위에서` 에른스트 윙거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155쪽
전쟁을 찬미하고 나치 집권에 일조하는 글을 썼다고 비난받는 동시에, 나치에 비판적인 작가로 간주되기도 하는 에른스트 윙거(1885~1998)의 대표작 `대리석 절벽 위에서`(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 지식인 한 명 한 명에게 정치적 결단과 결정이 요구되는 시기를 살며 민감한 정치적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던 동시에 독보적인 미학적 성과를 보여준 에른스트 윙거는 독일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작가이자 철학자이다.
윙거는 세계적 명성에 있어서도 이미 오래 전에 20세기 독일문학의 가장 대표적인 작가들 중 한 사람으로 꼽혔지만 한국에서 그의 작품이 출간되기는 이번에 처음이다. 그것은 니체의 영향을 받은 초기 윙거의 반민주주의적 사상으로 인해 독일에서도 그의 문학적 가치가 다소 늦게 인정된 데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윙거 정도의 명성과 영향력을 지닌 20세기 세계 문학 거장이 국내에 최초로 번역, 소개되는 케이스는 앞으로 더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윙거는 국내에 미지로 남아 있는 최후의 20세기 거장이었다고 할 만하다.
땅을 일구며 영혼과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지키며 살아가는 곳, 마리나. `나`와 오토 형제는 이 목가적인 땅의 대리석 절벽에서 식물계를 연구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산림감독원장과 그가 이끄는 마우레타니아 인들의 횡포로 이 평화롭고 조화로운 삶은 피로 얼룩지게 된다. 1939년에 발표한 `대리석 절벽 위에서`는 나치 정권이 주도한 폭력 시대의 역사적 반성을 담았다고 해석되는 작품이다. 하지만 정작 윙거는 `산림감독원장`이 히틀러 한 사람을 지칭한다기보다 지구상에서 사라진 적이 없는 독재자의 한 전형이라고 말한다.
시대를 추정할 수 없는 가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무법의 독재정을 보여주는 이 작품이 나치 정권을 겨냥한 것으로 한정된다면,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가 돼버리고 만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에도 양상을 달리한 채 폭력과 압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폭력으로 얼룩진 인간 역사의 축소판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언제 어디서든 당대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이 짧은 장편 소설은 영혼의 힘과 자연의 신비를 따르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우리`(화자인 나와, 함께 식물계를 연구하는 오토 형제)가 잔인한 독재자 산림감독원장 무리의 횡포에 맞서 저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의 장소 혹은 인물 들이 실제의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들과 뚜렷한 대응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먼저 `나`와 `오토 형제`가 기거하는 운향초 암자는 윙거가 동생 프리드리히 게오르크와 2차대전 직전에 살았던 위버링겐을 그린 것이며, 마리나의 풍경은 보덴 호수 지역을 닮았다고 한다. 한편 용기와 호기를 갖추었으나 결국은 잔인한 폭력 위에 권력을 구축하는 산림감독원장은 히틀러나 스탈린, 혹은 헤르만 괴링을 암시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 작품이 출간되자 나치 정권하에서 문화를 통제하던 이들은 즉시 윙거를 체포하고 강제수용소로 보낼 것을 건의했으나 히틀러가 직접 말렸다는 에피소드도 전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