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은 어디로 갔나` 서영은 지음 해냄 펴냄, 308쪽
“소재는 자전적이지만 나는 나 자신이나 김동리에 대해서 가능하면 사적 감정을 배제하고 오로지 인간성의 깊이를 드러내는데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무한유(無限有)한 인생의 심오함을 소설로 담아내고 싶었다.”- `꽃들은 어디로 갔나`작가의 말 중
한국 문단의 거목이었던 소설가 김동리(1913~1995)의 세 번째 아내, 30대에 혜성같이 나타나 이상문학상을 받은 화제의 여성 작가 서영은(71)씨의 자전적 장편소설`꽃들은 어디로 갔나`(해냄)가 출간됐다.
문학을 통해 구도(求道)의 길을 걸어온 서씨가 인고(忍苦)의 사랑을 그린 이 책은 그가 김동리와 함께 보낸 지난한 삶을 픽션으로 옮겼다.
서씨는 마치 자신과 김동리를 제3자인 것처럼 3년여 결혼 생활을 무심하고도 담담한 문체로 풀어내며 둘의 관계를 통해 사랑의 본질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든다.
30대에 문단에 등단, 이상문학상과 연암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활발한 창작 활동을 하던 서씨는 44세 때 김동리 선생의 세 번째 아내가 됐다. `등신불` 등 수많은 소설을 발표해 한국 현대문학의 거목으로 불리던 김동리 선생의 당시 나이 74세였고 두 번째 아내 손소희 여사를 사별한 후였다. 결혼생활은 3년 만에 끝났지만, 이들의 결혼은 당시 문단의 대단한 화제였다.
삶의 근원과 존재론적 슬픔을 그려낸 서씨의 작품세계는 1968년 등단한 이래 46년간 이어져왔다. `그녀의 여자` 이후 14년 만에 출간하는 일곱 번째 장편인 이번 신작에서도 작가는 남녀의 사랑을 넘어선 깨달음의 경지를 이뤄낸다. 작품의 일부는 2004년 `작가세계`(서영은 특집)에 게재된 바 있다. 소재는 자전적이지만 오랜 세월을 통해 정련된 3인칭 서술의 어조는 무연(無緣)하기까지 하며, 작가 스스로도 “사적 감정을 배제하고 오로지 작가로서 삶의 진실, 인간성의 깊이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노라고 밝혔다.
소설은 두 번째 아내와 사별한 70대 노인 박 선생의 세 번째 아내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40대 여인 강호순의 내면을 3인칭 시점으로 그린다. `50, 60대 시절, 대학에서 맡고 있던 직함 외에도, 중요한 직함만 일고여덟 개 이상`이었던 남자의 외도 상대였다는 것만으로도 호순의 사랑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다. “우리 박 선생 불쌍한 사람이야. 잘 지켜줘”라는 말을 남긴 뒤 세상을 떠난 전처의 자리에 들어가게 된 호순은 아내로서 응당 누려야 할 것들을 제대로 챙기지도 못한 채 그늘과 구석을 오가며 삶을 견뎌 낸다.
이념 지향적 문학이 주도하던 7~80년대, 서영은 작가의 작품들은 개성적이고 이채로운 공간을 구축한 정신적 모험이었다고 평가된다.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1983년, 컬러TV와 프로스포츠 등으로 독서문화가 위축되고 산업화에 발맞춘 처세서와 대중소설이 쏟아지던 때에 작가는 근대적 합리주의와 물신주의의 반대편에서 삶 자체가 안고 있는 시련을 평범한 일상 안에서 `실천`하는 작품을 선보였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속물적 세계에서 `참된 나`의 세계로 건너가는 `다리`를 보여준 첫 단편 `교(橋)`와 세속의 허무와 무의미를 극복하는 `사막을 건너는 법` 그리고 `관사 사람들`에서 드러난 순수한 생명력이 `먼 그대`에 이르러 고통(사막)과 극복(물)의 힘을 함께 품은 불사의 낙타가 됐다고 설명했는데, 이는 신작 `꽃들은 어디로 갔나`의 주인공 호순에게서도 구현된다.
`생의 중심`에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담금질하는 그녀는 한 남자의 생애와 비속한 일상을 포용함으로써 현실을 전복해 나간다. 성공한 남자의 세속적 외관을 떠받치는 `순결한 안감`이자, 나약해진 그를 보듬는 강인한 보호막이기도 한 호순은 `먼 그대`의 `낙타`를 더욱 다면적으로 드러낸다.
`생의 가시밭길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감으로써 마침내 자존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발견한` 주인공의 초극적 자아는 인생의 참뜻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진정한 사랑과 삶의 의지를 북돋는 돌파구가 되어줄 것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