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핸드폰임에도 소리가 고르지 못해 일찍 퇴근하여 서비스센터에 들렸더니 기기고장이 아닌 프로그램상의 문제라서 잠깐 사이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이렇게 시간이 어정쩡 남을 때는 무엇을 해야 하나? 아 그렇다. 미술관에 가자.
그리 멀지않은 도심해변 인근 공원 안에 위치한 포항시립미술관에 들렀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그 넓은 공원 안에 몇몇 외에 인적이 드물었다. 미술관 안도 그런 면에서 적막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필자는 그러한 적막함을 즐기는 것 같다.
적막함이라기 보다는 고급스러운 어두운 회색톤, 간결 속의 고고함을 주는 듯한 건물 내부에서 때로는 소박하고, 때로는 화려하며, 때로는 알 듯 말 듯한 그림이며 조형물들을 감상하며, 숨겨진 내 자신의 순수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필자는 그래서 이 시간을 즐기는 것이라고 강변하고 싶다. 이날은 `영남의 구상미술`이라는 주제 아래 영남권에 거주하시던 초창기 근대미술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대부분 1900년대 초반에 출생하여 1950~60년대에 돌아가신 분들의 작품으로서, 1930~40년 혹은 50년대에 그려진 작품들이었다.
이 그림들은 국립미술관이나 전쟁기념관 등에서 볼 수 있는 큰 주제의 대작들이 아니고 생활소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다. 풍경화 중에는 지금도 같은 모습의 산과 바다를 그린 것도 있고 영화에서나 보임직한 옛 거리의 모습도 있고 우리 어릴 적에 자주 뵙던 이모나 조부모님들의 모습도 있었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우리나라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암울한 시절에 그려진 것들인데 작품들에서 그러한 역사가 보여지고 있어 안타까웠다. 기모노 입은 여인이 섞여 활보하는 소도읍 거리에 집집마다 게양된 태극기, 일제 강점기인 1930년의 작품이다. 조그만 재생지 위에 그려지고 채색된 6·25전쟁 당시의 형산강 전투 장면, 1950년의 작품이다.
이들 작가들은 지금 97세로 생존해계신 한 분을 빼고는 대개 50~60대에 돌아가셨고, 여러분들이 30대에 폐병 내지 다른 지병으로 세상을 하직하셨다니 더욱이 안스러웠다. 이게 우리나라이고 선조들의 힘든 인생살이였다.
다. 2층에서는`경계와 탈경계`라는 제목으로 40대가 주축을 이룬 젊은 작가들의 비주얼아트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움직이는 동영상의 상징적인 이미지들의 작품이다. 좀 난해하기는 하지만 그냥 감상도 해보고 작가의 설명을 읽으며 감상해보기도 했다.
이러한 비주얼아트들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익숙한 신세대들에게는 크게 새로울 것이 없는 것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스케일에 있어서 스마트폰 이나 텔레비전 화면과는 비교가 안되는 웅장함을 준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작품에 함축된 스토리들이다.
영남의 구상미술전에 전시된 작품들을 대상으로 그 그림의 예술적인 완성도로만 가치를 매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허나 그 그림이 그려진 그 시대의 갖가지 이야기들이, 그리고 작가들 삶의 일면이 함축되었다고 생각하면 그 그림들은 그냥 그림들이 아닌 것이다.
밖으로 나오니 추운 바람이 옷깃을 여밀게 한다. 외설적이라 할 만한 조각 작품들을 지나서 물 마른 폭포수를 지나니 비닐에 쌓인 동물우리들이 보인다. 이 추운 날씨에 창살높이 매달린 것은 빨간 얼굴의 일본원숭이다.
이 도시에 잠시 시간을 내어 갈수 있는 곳은 많다. 도심거리의 우아한 커피숍, 영일만해수욕장 해상누각, 활어가 있는 죽도시장, 그리고 최근 개장한 포항운하 크루즈 등.
하지만 이 환호해맞이공원의 포항시립미술관은 방문객들에게 또 다른 인상과 추억을 만들어 주는 곳이다. 올 들어 첫 방문이지만 작년에 그랬던 것처럼 올해에도 학생들과 외국인 친구들과 혹은 혼자서라도 작품이 바뀌고 계절이 바뀜에 따라 몇 차례 더 방문하고 싶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