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승 은
동백나무 숲으로 뛰어드는 여우비에
일제히 목을 놓는 꽃들의 환한 도열
꽃받침 덩그런 자리 미열 아직 남았다
못 지킨 언약처럼 필 때보다 질 때 붉은
서로가 미루지 않고 유감없이 저무는 일
덧 자란 그늘에 엎여 봄은 마냥 저만치다
오면 가는 것이 숨 탄 것의 항다반사
목숨껏 받든 나날 다 앗기고 스러졌다
꽃으로 다녀갔구나,
날 잃고 널 얻었는데
입춘 지난 남녘에는 봄빛이 완연하다. 남해안의 여러 섬이나 해안에 산재해있는 동백나무 숲에는 붉은 빛이 번지고 있다. 아직은 차가운 기운이 아침 저녁으로 뻗쳐오고 있는데 자연의 순환은 어길 수 없는 진리다. 화르르 타오르다 후두둑 떨어져버릴 꽃들의 환한 도열을 생각하는 시인의 가슴 속에는 동백꽃보다 붉은 사랑의 빛이 스며 있음을 본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