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르완다로 간 젊은 의사

등록일 2014-02-27 02:01 게재일 2014-02-27 18면
스크랩버튼
▲ 이성홍김천대 교수
지난 1월 중순 대구에 있는 대봉교회에서 아프리카 르완다로 젊은 부부의사를 선교사로 파송했다. 한국에서도 여유롭고 풍족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젊은 의사부부는 왜 르완다로 자원하여 의료 선교사로 떠났을까?

아프리카는 아직도 우리에게 미지의 땅이다. 그러나 최근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사건들, 즉 이집트 한국성지순례단의 테러사고 등으로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르완다는 20년 전 1994년 4월6일부터 시작된 분쟁인 제노사이드(Genocide)로 잘 알려진 나라다.

르완다는 1인당 GNP가 약 300달러인 최빈국 중 하나이다. 르완다 대학살은 1994년에 발생한 투치족과 후투족 간의 종족 분쟁이다. 후투족은 800만에 이르는 르완다 인구의 85%를 차지하는 다수 부족이면서 오랜 세월 소수 부족인 투치족(15%)의 지배를 받아 왔다. 특히 1916년 르완다를 식민통치하던 벨기에가 투치족을 우대하고 후투족을 홀대하는 종족 차별정책을 펴면서 골이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은 1973년 후투족 출신 쥐베날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으면서 뒤집혔다. 차별에 시달렸던 후투족이 르완다의 실권을 장악했는데, 1994년 대통령 탑승 비행기 격추 사건으로 후투족은 투치족을 `바퀴벌레를 잡자`며 보이는 대로 살해하기 시작하여 100만명 이상이 살해된 대학살로 이어졌다.

이때 의사를 위시한 지도층들은 해외로 탈주했고 국경지역의 미국 선교 단체 등에서 운영하는 병원이 그나마 있는 실정이다.

2012년 8월 르완다 의료봉사단을 이끌고 25시간을 날아 르완다에 도착하여 시골에서 3일간 의료 봉사를 할 때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소문을 듣고 수십 리 떨어진 곳에서 새벽부터 걸어와 진료를 받으려는 수백 명의 주민을 다 진료하지 못하고 돌려보낼 때의 그들의 슬픈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다. 하루에 150명 정도의 환자를 진료하고 나면 의사들은 기진맥진하게 된다. 그리고 한 사람을 진찰하는데 이중 통역을 해야 하니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 젊은 의사부부는 이때 많은 것을 느꼈다고 한다. 멀리서 조금 도와주거나 일시적 의료봉사로는 근본적인 도움을 줄 수가 없어 이들의 진정한 이웃이 되려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직접 이들 속으로 뛰어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130여 년 전 조선의 첫 의료선교사로 1884년 9월 이 땅에 온 알렌은 암울하던 시기에 의술과 선교 그리고 교육을 통해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한국 최초의 병원 광혜원(세브란스병원 전신)을 세워 서양의학의 효시가 됐다. 대구 경북에서도 1899년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된 존슨 선교사이 제중원(동산병원 전신)을 설립해 서양의술의 시작이 됐다.

조선 개화에 지대한 역할을 한 이들 의료선교사의 노력이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된 한 요인이 됐음을 상기한다면 르완다로 떠난 박준범, 백지연 두 부부의사의 결단은 아무리 칭찬한다 한들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월급이나 사례비도 받지 않고 순수한 봉사와 선교만을 목적으로 떠난 것이다. 언어문제, 아이들 교육문제, 재정문제 등 부딪치는 문제가 한둘이 아니지만 신앙적인 큰 결단을 통해 이들은 기쁜 마음으로 아프리카의 오지 르완다 시골로 떠난 것이다.

그곳 시골 병원에서 주민 진료는 물론 의사 재교육과 의대교육을 통해 선진 한국의 의료 기술을 전수하고 교육한다면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척박한 르완다의 땅에 희망을 싹 틔울 것이다. 이 작은 싹이 자라나 나무가 되고 숲을 이루는 그날이 오면 르완다는 평화롭고 발전된 선진국가가 될 것이다.

오늘날 돈과 명예와 권력을 탐하는 약삭빠른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20세기의 성자 슈바이처나 이태석 신부 같은 분들처럼 진정으로 불쌍한 이웃을 위해 헌신하려는 젊은이들이 많은 사회가 평화롭고 정의로운 지구촌이 될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대들이 아름다운 사역이 끝나는 날 부디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길 나는 기도한다.

아침산책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