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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의 위기

등록일 2014-05-15 02:01 게재일 2014-05-15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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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교수·국문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모 작가 선배와 서울에서 오랜만에 자리를 같이 했다. 작가며 평론가는 본래부터 말이며 글로나 먹고 사는 실없는 존재들이다. 그게 글쟁이들의 슬픈 운명이다. 그 날도 평론가 격의 나와 작가 격인 모 선배는 세상 일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갑론을박했다.

때마침, 그 무인기의 정체에 관한 국방부 발표가 있었다. 북한에서 보낸 게 확실하다는 것이다. 뉴스를 접하고는 우리는 세상에서 듣고 본 이야기를 나눈다. 장난감이라느니, 진짜라느니, 말들이 많았다.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데 판단이 같지 않다. 한 사람이 더 끼어드니 이제는 바야흐로 삼파전이 된다.

요즘 우리 사회 모든 일을 놓고 서울은 이렇다. 왜 하필 서울이냐 하면, 다른 곳들은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생각들이 겉으로 대립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그게 더 위험할 수도 있다. 큰 위험은 예고가 없다.

세월호 사태를 놓고도 양상은 똑같다. 정부 발표나 해경 발표를 턱 믿고 싶어도 사태 첫날부터 몇 날 몇 일 동안 보고 들은 것하고는 너무 다르다. 공영방송이며 공중파 방송이며 각각의 신문들을 다 올려 놓고 봐도 이미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이 있어 곧이곧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뿐만 아니다. 겉보기에는 몇몇 주요 신문, 방송밖에 없는 것 같아도, 유튜브니 뭐니에서 키워드만 넣어 보면 제각기 각도와 해석을 달리하는 자료들이 하나둘 아니다. 그런 것들이 조회수가 많게는 수십만 회까지도 된다.

사람들은 눈 바보, 귀 바보가 아니다.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하는 사람들은 나이 많으신 어른들이요, 세상 풍파 많이 겪어 이러니 저러니 해야 소용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다. 세상에는 생각 다른 사람, 기질 다른 사람이 하나둘 아니다. 갖가지 사람들이 모여 이 사회라는 것을 이루어 나간다.

생각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다. 관점이 다른 것도, 누가 옳다고,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게 남의 것인 한 쉽사리 관여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어떻게 이 사회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나?

나는 그것이 기본적인 신뢰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해석이나 관점은 달라도 기본적인 정보만은 함께 나눠야 한다. 이도 아주 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사실, 진실에 가능한 한 가까운 정보가 가급적 많은 사람들에 의해 공유되어야 한다. 이 기본적인 요건이 그럴듯하게라도 갖추어진 후에야 갑론도 의미 있고 을박도 의미 있다.

우리는 너무 오래 불투명하고 베일에 가려 있고 또 일방적인 설명들뿐인 일들을 접해 왔다. 사태의 시말이 어떠한지,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도를 닦아야 하겠느니 한다. 일이 터질 때마다 무서운 세상이었느니 한다. 다들 믿을 건 부모 자식뿐이라고, 몸 단속, 입 단속 하느라 바쁘다. 빤히 앞에 앉았는 사람, 꽤나 간담상조하느니 하던 친구 사이도 정말 믿을 수 있나, 한다.

정부가 국민을 믿지 못해 유언비어 엄단을 말하고, 국민이 정부를 못 믿어`음성` 매체를 찾는다. 유족이 정부를 믿을 수 없어 항의방문을 하고, 정부가 유족을 못 믿어 순수 운운 한다.

이쪽이 저쪽을, 저쪽이 이쪽을 못 믿는 풍조가 사회 깊이 뿌리를 내렸다. 서로 믿을 수 없는 데서 오는 고통과 아픔이 간단치가, 만만치가 않다. 가히 우리 모두의 불행이라 할 만하다.

우리는 사회 공동의 구성원들이다. 이런 우리가 이토록 서로를 믿을 수 없다는 느낌에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는 모두 패배자요, 허무한 생애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치도, 선거도, 갈등도, 불행도, 슬픔도, 다 공동의 인식이 있고서야 의미가 있지 않을까. 어느 쪽이 이겼다 졌다 하기 전에 우리 모두 잃어버린 신뢰를 찾아 나서야 한다.

기본적인 사실, 진실의 공유. 이것부터 시급히 준비해야 한다. 그러면 이것은 누가 먼저 나서야 하는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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