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장수는 서울에서 멀다.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세 시간 반이 걸린단다.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건만 케이티엑스가 생긴 후부터는 두 시간 버스길도 멀게만 느껴진다.
버스 타고 한 번에 가야할 것을 서울역에 가 대전까지 갔다. 거기서 장수까지 그렇게 많이 걸릴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암초를 만났다. 열한 시 십 분인가 이십 분인가 대전 버스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버스가 막상 가보니 결행이다. 바람 불면 배 안 뜨듯이 오늘 그 시각 버스는 안 간다는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두 시까지 장수에 당도해야 하는데 큰 일이다. 방법 없나?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택시 탄다. 장장 10만원이나 되는 거금을 주기로 하고 택시는 대진고속도로를 달린다.
택시 안에서 나는 거의 자포자기한 사람의 심정으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본다. 시원스럽게 뚫린 고속도로 양 옆으로 푸른 산, 산, 산들이다. 며칠 소설`마의태자`를 읽었더니, 나도 자꾸 세상에 뜻없이 산속에나 들고 싶다.
장수가 목적지다 보니, `무진장`이라는 말이 저절로 생각 난다. 무진장은 무주, 진안, 장수를 하나로 묶어 이르는 말이다. 전국에서 예산이 제일 적다는 곳이 무주라던가? 무주 하면 나는 안 잊히는 기억이 있다.
나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는 우리 집안에서 학식이 가장 높은 어른이셨다. 외손자가 자그마치 열아홉인데, 유별나게 나를 귀여워해 주셨다.
여름 시골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등잔불 피우고 달빛 아래 저녁을 먹고 나면 외할아버지와 나, 둘이 툇마루에 앉아 옛날 역사 이야기를 한다. 연산군 얘기도 하고, 탐라 얘기도 하고, 마의태자 얘기도 한다. 어린 놈이 퍽 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다. 내 열 살 미만 때 얘기다.
세월이 흘러 내가 중학 때였나? 연로하신 외할아버지는 무주 구천동에 가고 싶어 하셨다. 그렇게 좋다는데 못 가보셨다고, 여러번 씩이나 말씀하시는 것을 구천동 가까운 대전 사는 어머니가 끝내 외면하지 못했다.
여름날이었다. 외할아버지, 어머니, 나, 그렇게 셋이서 무주 구천동 덕유산에 들었다.과연 깊은 산이다. 무더운 여름 한낮에 산속은 그늘이 깊고 땅은 질척질척, 이끼가 두텁다.
좋다고, 좋은 산이라고 감탄하시던 외할아버지께서 이듬해인가 초파일 가까운 때 찬물로 머리를 감다 쓰러지시고 말았다. 제주 고씨, 탐라 왕손이라고, 삼성혈 얘기 들려주시던, 만년 야당 외할아버지. 그때 외갓집에 매일 동아일보가 우편으로 왔다. 1면부터 마지막 면까지 한자도 빼놓지 않고 읽으셨다.
무주에는 또 애저찜이 있고, 진안에는 마이산이 있다. 그리고 장수는 진주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가 태어났다. 또, 한우가 있고 꺼먹 돼지가 있단다. 두시. 장수고등학교에 겨우 도착했다. 여기서 1박2일, 고등학생 아이들을 만나기로 했다.
이광수의 신라3부작, `마의태자`, `이차돈의 사`, `원효대사`, 그 모든 것 다 내려놓고, 백제 땅 `산속` 동네 장수로 왔다.
아이들과 함께 시 공부를 한다. 인근에서 공부하고 싶은 아이들은 다 모여든다는 산속의 아이들은 공부를 잘해도 천진난만하기만 하다. 옛날 아이들처럼 처음에는 수줍어하고 부끄럼을 탄다.
교정에 앉아 가는 빗속에서 노트를 들고 시상을 떠올리려 애쓰는 아이들을 보는데, 문득 한 줄기 눈물을 흘린다.
역사는 무정하게 저 갈 데로 흐르고, 어둠은 아픈 사람들을 늘 아프게만 하는데, 자라날 때, 피어날 때는 다 사랑스럽다. 모두 탐스럽다.
서울에서 너무 멀리 왔다. 하지만 내가 떠나온 것은 서울이 아니라 100여일 전 어느 사건으로부터다. 소설 속에서 나라가 망하자 마의태자는 어머니와 아내를 데리고 개골산에 든다.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죽음과 어둠의 나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