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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그 오래된 미래

등록일 2014-10-13 02:01 게재일 2014-10-13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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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식 시인

할머니들이 왁자지껄하다. 주변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꺄르르 웃으며 커피와 팥빙수를 먹고 있다. 시끄러운 음악이 흐르고 있지만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분위기다. 언뜻 봐도 일흔은 다들 넘어 보인다.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인 실내에서 분명 이색적인 풍경임엔 틀림없다.

이른바 고령화시대다. 65세 이상 노인인구 비율이 전체 인구의 7% 이상을 차지하는 사회를 고령화 사회라고 한다는데 한국은 2000년에 진입을 했다. OECD 국가 중에서도 그 속도가 급격하게 진행됐다고 하니 새로운 사회현상이다. 과학과 의학이 발달되고 평균적인 생활수준과 주변 생활환경이 개선된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아무튼 거리에는 할머니들이 넘쳐난다.

아메리카 대륙의 라코타 인디언들은 살면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할머니들에게 지혜를 구한다고 한다. 할머니들이 살아온 삶의 경험들이 다음 세대를 바르게 인도하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설화에는 마고할미가 있다. 강, 바다, 섬 등을 만들었다는 마고할미는 새의 발톱처럼 긴 손톱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의 가려운 데를 긁어준다고 한다. 삶의 상처를 위로해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기를 점지하는 일과 출산 및 육아를 관장한다는 삼신할미도 있다. 이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할머니들은 생명과 지혜, 치유의 상징이었다.

어릴 때 나는 할머니와 함께 생활했다. 서른에 할아버지를 먼저 보내고 혼자된 할머니는 장남인 나를 유별나게 좋아했다. 할머니와 건넛방에서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함께 보냈다. 할머니의 영역은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엄마로부터 야단을 맞거나 할 때는 그 너른 품 뒤에 숨으면 무난하게 넘어가곤 했다. 요구사항이 있을 때도 할머니를 통하면 대개 해결이 되었다.

할머니는 내게 많은 것을 이야기해줬다. 할아버지와 만났던 이야기, 미역을 팔기 위해 산을 몇 개나 넘었던 얘기, 부엉이가 울던 서낭당 얘기 등.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문지방을 밟지 마라`, `베개를 타 넘지 마라` 등의 금기사항은 물론이고 싸리 빗자루 예쁘게 매는 법, 떫은 감 잘 삭히는 방법도 가르쳐 줬다. 과메기가 어떻게 쫄깃쫄깃 익어 가는지, 세 물때 즈음엔 왜 오징어가 잘 잡히는지도 설명해줬다. 할머니는 살아있는 백과사전이었다.

`수상한 그녀`는 할머니를 소재로 히트한 영화다. 어느 날 `청춘사진관`에 가서 영정사진을 찍다 스무 살 꽃 처녀가 된 칠순 할머니의 이야기다. 손자뻘 나이의 청년에게 구애를 받기도 하면서 좌충우돌하지만 그녀는 끝내 늙은 모습의 현재의 시간으로 되돌아온다. 젊음과 늙음, 현 세대와 지나간 세대의 시간을 오가면서 가족의 중요성과 나이 듦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유지한 영화이다.

북유럽신화에 `미미르의 샘`이 나온다. 세계수(世界樹)인 이그드라질의 뿌리 밑에 있다고 하는 이 샘은 지혜의 샘이다. 나무의 소유자인 미미르는 날마다 개라르호른이라는 뿔잔으로 샘물을 마셔 지혜로워졌다고 한다. 할머니는 지혜의 샘을 가진 큰 나무다.

내가 어릴 때인 60~70년대만 해도 3대(代)가 함께 사는 것은 보통이었고 어떤 집은 4대가 모여살기도 했다. 그러나 핵가족화가 진행되면서 젊은 세대들은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기를 거부한다. 할머니들도 더 이상 자녀에게 짐이 되기 싫다며 자식들과 살기를 꺼려한다. 할머니들이 넘쳐나지만 정작 우리는 할머니를 잃어버린 세대를 살아가고 있다. 정신의 가치는 사라지고 물질이 그 자리를 대신해버린 것이다.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면 지혜의 샘물 한 바가지 퍼주던 할머니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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