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굵고 짧게 살자`는 말을 달고 살았다. 한번뿐인 삶을 폼나고 멋있게 살자는 말이니 옳고, 좋다고 믿었다. 그래서 굵고 짧게 산 위인들의 전기를 즐겨 읽었다. 그들의 신화는 언제봐도 탄성을 자아냈다.
지난 2011년 10월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스티브 잡스 역시 자타공인 `굵고 짧게`산 인물이다. 약관 20대 후반에 매킨토시 컴퓨터를 내놔 세상을 뒤흔들었던 그는 죽기 직전에 애플 신화를 낳으며 하나의 역사로 자리매김했다. 태블릿PC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아이패드를 발표하기 위해 TV에 나온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짧은 머리에 항암치료 여파로 홀쭉한 볼, 움푹 파인 관자놀이는 마치 수도사를 연상케 했다. 안경 너머의 눈에서는 젊은 시절의 당당함이나 자신감 대신 섭리에 순응하겠다는 듯한 고뇌와 성찰이 내비쳤다. 누군들 굵고 길게 살고 싶지 않으랴. 남다른 노력으로 기념비적 성취를 이룬 사람이 굵을 수는 있으되 길기는 쉽지 않다. 성취에는 가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이 일상처럼 따르게 마련이었을 것이다.
“곧 죽게 된다는 생각은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할 때마다 큰 도움이 됩니다. 사람들의 기대, 자존심,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 거의 모든 것들은 죽음 앞에서 무의미해지고 정말 중요한 것만 남기 때문입니다.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무언가 잃을 게 있다는 생각의 함정을 피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잃을 게 없으니 가슴이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을 이유도 없습니다.”지난 2005년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식에서 그가 한 연설은 자신의 굵고 짧은 삶을 미리 내다본듯 했다.
그러나 별달리 이룬 것 하나 없이 스티브 잡스가 숨진 나이에 근접한 필자는 이제 마음을 바꿔 먹었다. `가늘고 길게`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한국영화 11번째 천만관객의 영화로 떠오른 `국제시장`의 주연배우 황정민이 TV에 나와서 소감을 말했다. “전 늘 관객분들한테 이야기하지만 인생을 가늘고 길게, 배우로서도 가늘고 길게…굵고 짧게는 싫습니다.”
그의 농담반 진담반 섞인 소감이 가슴에 와닿았다. 백세시대에 `굵고 짧게`는 저주가 될 수 있다.
사실 `가늘고 길게`란 말은 대구출신으로 충암고와 동국대를 나와 1983년부터 OB베어스의 투수로 활약한 야구선수 장호연이 유행시킨 명언이었다. “가늘고 길게 갈게요”를 입에 달고 다닌 그는 OB베어스에서 10년동안 109승을 올렸다. 확실히 `가늘고 길게`선수생활을 했다.
내가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소리꾼 장사익(65)은 상고 졸업후 보험회사를 비롯해 직장 10여 곳을 다니다가 마흔을 넘은 나이에 가수로 데뷔한 걸로 잘 알려져있다. 장사익은 데뷔이후 20년을 한결같이 노래하는 데, 콘서트할 때 마다 티켓이 매진된다. 그의 노래에는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신명이, 또 한편으로는 가슴을 후벼파는 단장의 슬픔과 한이 넘친다. 그의 작곡방법은 독특하다. “해거름녘 좋아하는 시를 벽에 붙여놓고 가만히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소리가 나와유.” 가사에 소리를 얹고 마음을 담아 곡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선지 그의 노래는 꾸밈없고 편안하면서도 청중의 심금을 울린다. 신곡 녹음을 할 때도 남다르다. 반주 먼저 녹음하고 노래를 맨 마지막에 녹음하는 게 보통이지만 그는 모든 연주자와 함께 녹음하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그는 거기에 대해“오늘 바로 지금의 호흡이 주는 맛과 멋이 있으니까요”라고 답한다. 앞으로의 꿈을 묻는 질문에 그는 구수한 충청도사투리로 이렇게 답했다. “나는 아흔 살까지 갈라구유. 삐걱삐걱하면서. 죽음을 앞에 두고 노래하는 게 얼마나 재미있을지, 흥미롭게 기다려유. 가늘고 길게 가야 돼, 우덜은. 스포츠처럼 굵고 짧게 가면 안 되쥬.”
굵고 짧기 보다 가늘고 길게 가야할 백세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