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6·15 공동 선언 8주년 기념 남북 학술 강연회에 참여한 바 있다. 북한 김철주 사범 대학의 정모 교수는 느닷없이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이라는 대북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남측의 발표자인 필자로서는 이에 대해 강력히 반론을 제기하고, 우리의 대북 정책의 진의를 청중들에게 소상히 설명한 적이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최근 펴낸 `대통령의 시간`이라는 회고록에서 재임 중의 남북 협상 과정까지 소개하고 있다. 그는 회고록에서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이 나를 계속 만나고 싶어 했다”면서 “북한이 직·간접적으로 5번이나 남북정상회담을 먼저 제안했다”고 밝혔다. 또한 북한 당국은 정상회담의 대가로 100억 불이라는 금품을 요구했으며, 그 제안 당사자 김양건의 실명까지 거론하였다. 또한 이 회고록에는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와의 비공개 석상의 한중회담 비사까지 폭로하고 있다. 한편 북한당국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1년 6월 남측이 정상회담을 재촉하며 돈 봉투를 건네려 했다고 일방적으로 공개한 바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퇴임 2년도 안되어 회고록에서 남북문제 뿐 아니라 재임 시의 업적에 관하여 입장을 피력한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전임 대통령은 4대강 사업과 자원 외교에 관한 혈세 낭비라는 비판이 전직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현 정부의 조급한 남북 회담 제의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으며 재임 시 자신의 대북 정책에 대한 입장을 변호할 의도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폭로를 두고 여론은 찬반양론으로 갈리고 있다. 이 대통령의 입장을 두둔하는 입장도 있지만, 이러한 폭로가 남북관계 개선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론도 만만치 않다.
전직 대통령도 남북문제 뿐 아니라 정치 현안에 관하여 자신의 입장을 발표할 수는 있다. 그러나 국가 경영을 책임졌던 전직 대통령의 회고록이 현실 정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면 이는 분명히 신중했어야 할 사안이다. 더구나 박근혜 정권이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고 남북 회담을 제안한 상황 하에서 그 파장을 충분히 고려했어야 한다. 그 것이 자칫 현 정권의 대북 협상을 위축시킬 뿐 아니라 그것 자체가 남북 대화의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박근혜 정부가 북한 당국의 무모한 자세와 태도를 몰라서 남북 회담을 제안한 것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로서는 분단의 역사가 70년이나 흐른 이 시점에서 남북관계의 개선이 국가적 과제로 시급하다는 인식이 선행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남북관계 개선 없이는 박근혜 정부의 신뢰 프로세스도 드레스덴 선언도 한 발짝도 진전할 수 없다. 특히 지난해의 통일 대박론에 이은 유라시아 이니시아티브, 경의선 철도 연결, DMZ평화 공원, 라진-하산 프로젝트의 참여도 북한의 참여 없이는 불가능한 사안이다. 더욱이 이 명박 정부의 5·24 선언이라는 멍에를 풀기 위해서도 남북 회담은 급박했으며 북한도 이에는 동의하기 때문이다.
`소시지와 외교는 만드는 과정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외교 관례이다. 우리는 NLL을 둘러싼 노무현 정부의 대화록 공개문제로 한동안 진통을 겪은 적이 있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지난번의 대화록 공개논쟁은 우리 사회의 엄청난 갈등의 비용만 치르고 끝나 버렸다. 이번의 전직 대통령의 발언도 현 대통령의 대북 협상 공간을 축소케 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전직 대통령의 회고록은 그것이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보다 신중한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대통령 기록물 관련법이 대통령 재임 시의 통치 행위에 관한 기록은 일정 기간 비공개 원칙을 적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