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앞에 흔히 붙는 수식어가 `화사한`이지만, 며칠 동안 쉼 없이 내린 비는 화사한 봄날이 아니라 `어두운` 봄날이 되게 했다. 잠깐, 꽃들이 예쁘게 피어 화사한 봄날인듯 싶더니만 이내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 꽃잎이 지고, 뒤이어 꽃을 떠받들고 있던 꽃대마저도 뚝뚝 떨어져내려 나뭇가지 위에서가 아닌 땅에서 꽃들은 온통 비를 맞으며 세상과 이별하는 어두운 풍경을 만들어 냈다. 모름지기 생명이 있는 것들은 그 기한이 있어 슬픔이라는 감정을 부추기는가 하면, `미인박명`이라는 말은 아쉬움까지 더하는 슬픔을 부르기도 한다. 최근의 뉴스들을 지켜보면서 꽃이 지는 일을 슬퍼하는 것은 사치라는 생각이 문득 들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슬퍼해야 할 일은 인간의 양심 오작동으로 인한 불행들이라는 생각이 짙어졌다.
양심이라는 말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그 무엇으로 인간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고, 인간만이 항구적으로 지니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이다. 양심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이다. 가치, 변별, 행위, 옳고 그름, 선과 악, 판단, 도덕…. 이런 단어들은 인간들이 고안해 낸 단어들로, 인간이 지녀야할 최소이자 최고의 덕목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양심의 작동은 각각의 존재들이 주체적으로 담당하는 것이 원칙이고, 그 수위의 정도를 정하는 것도 각 존재들의 몫이다. 따라서 행위의 결과는 양심의 정도를 알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근간은 각 개인들의 양심이 순조롭게 작동하는 것으로 유지된다고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가 `명예는 밖으로 나타난 양심이며, 양심은 내부에 깃든 명예`라는 말로, 양심의 올바른 작동을 명예와 결부시켜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양심이 바른 작동을 하기에는 속세의 유혹들이 너무도 많고, 오작동의 내용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그에 합당한 법적 처벌을 흔쾌히 받을 만큼 용기 있는 사람들도 흔치 않다. 양심의 오작동은 당연히 도덕성을 상실한 행위로 나타나지만 사적이고 은밀한 거래일 경우, 그 본래의 모습을 보기란 매우 어렵다. 우습게도 사람이 만든 기계가 양심의 작동과정을 진솔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대단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따르면 거짓말탐지기는 `자각증세와 심적 변화에 따른 자율신경계의 각종 반응을 이용하여 피의자 진술의 진위성을 판별하는 장치로, 폴리그래프의 일종이며, 고의로 거짓말을 할 때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로 인해 호흡이나 혈압, 맥박 등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기록하는 장치`라고 한다. 거짓말탐지기가 처음 나왔을 때 과연 사람이 하는 거짓말을 기계가 잡아낼 수 있을까에 대한 의혹들이 많았고, 실제의 상황을 반영하기 곤란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휴대폰, 내비게이션, CCTV, 녹음기, 카메라 등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최첨단 기기는 거짓말탐지기에서 보이던 시시비비가 힘을 쓸 수 없게 만들고 있다. 휴대폰의 통화기록, 주고받은 문자들은 그들이 언제 무슨 이야기들을 주고받았었는지 그대로 남아 있다.
내비게이션의 기록은 그들이 언제 어디서 어디로 갔는지 고스란히 알려주고 있고, CCTV는 그들이 언제 그 장소에 있었으며, 또 거기서 무엇을 했는지 그들의 행동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녹음기는 그들이 어떤 은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는 물론이고 숨소리까지도 정확하게 들려주고 있고, 카메라로 찍은 사진에는 인물들이 모여서 의기투합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담겨 있다. 사람이 말하기 싫은, 말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기계가 대신해 주고 있는 셈이다. 기기들이 사람의 양심이 한 일을 밝혀 낼 수 있다니! 참으로 놀라운 명명백백한 세상을 사는 슬픔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