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하버드 메디컬 스쿨을 다니는 영어 튜터(tutor)와 만났는데 대화를 하다 보니 위안부 문제가 화제가 되었다. 원래 서로 대화하려고 한 것은 한 인도계 미국인이 인도의 델리에 출장을 갔다가 유산을 하게 되면서 알게 된 인도의 의료 현실에 관한 것이었다. 인도에서는 부유한 여성들은 좋은 병원치료를 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여성들은 병원은커녕 치료를 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 하다 보니, 최근 우리나라에 보도되어 큰 관심을 끌었던 인도 여대생에 대한 집단 성폭행 사건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가난한 나라일수록 여성의 지위가 매우 낮고 여성의 복지도 매우 열악한 수준이라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여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우리의 화제는 얼마 전 있었던 케네디 스쿨 앞에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다국적 시위와 `하버드 크림슨`에 실린 기사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녀는 나보다 위안부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Vagina Monologue(여성의 독백)`라는 책을 인터넷에서 찾아서 보여주기까지 했다. 이 책은 Eve Ensler가 쓴 에피소드 연극 모음집으로 여기에는 `위안부를 위하여(for the comfort wom en)`이라는 시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의 이야기는 오직 우리들의 머리에, 우리의 황폐한 몸속에, 전쟁의 시간과 공간속에, 그리고 공허 속에 있다”로 시작되는 이 시의 하이라이트는 종군 위안부들이 “파괴되고, 도구가 되고, 불임이 되고, 구멍이 되고, 피가 되고, 고기가 되고, 유배되고, 침묵 당하고, 혼자가 되고, 그들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부분이다. 전쟁터의 창고에서 위안부들은 일본 군인들의 성욕을 채우는 도구로, 구멍으로, 고기로서 다루어졌으며, 병, 자살, 혹은 구타 등이 그들을 기다리는 미래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단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상실한 `성 노예`였을 뿐이다.
작년에 우리 국민들은 인도 여대생이 인도 남성들로부터 집단 성폭행을 당하는 것을 뉴스 보도로 접하고 몹시 분노했고, 더구나 그러한 집단 성폭행이 그녀의 탓으로 돌려질 때 인도 사회에 대해서 경멸에 가까운 기분을 느꼈었다. 하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은 저 여대생과 같은 경험을 매일매일 끝이 없이 겪어야 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세상의 눈을 피해 숨어살았고, 오랫동안 침묵 속에서 신음하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 국민들은 인도 여대생 사건만큼도 날카롭게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많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자신의 원한과 고통에 대한 적절한 위로를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살아계시는 분들에게도 적절한 위로와 보상이 주어질지 의문이다. 이 분들은 아베 수상이 말한 것처럼 `인신매매의 희생양`으로서 불쌍하고 동정 받아야 할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속임수에 당한 죄 없는 처녀들`이었다. 이점에 대해서 일본 정부가 자신의 역사적 과오에 대해 진심어린 사과를 하는 것이 위안부 할머니들이 바라는 것이다. 이 사과는 가엾은 사람에게 보내는 어떤 우월한 제스처가 아니라, 동등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진심 어린 것이어야 할 것이다.
`위안부`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발생한 일이지만, 현재는 세계 여러 곳에서 문화적, 종교적, 혹은 경제적 이유로 고통 받는 여성들의 상징이 되었다. 고통 받는 여성들을 떠올릴 때 `위안부`보다 더 고통 받는 여성을 떠올리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간혹`위안부`문제에 대한 신문보도-결국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보면 이를 일본에 대한 정치 공세나 기사의 조회수를 올리기 위한 상업용 아이템으로 취급하는 경향도 있어 보인다. 만약 이런 면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모두 떨어버리고, 우리 국민 모두가 이 문제를 정말 가슴으로 생각하고 `위안부`들이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사과와 보상을 받는 데 힘을 보탰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