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쓰겠습니다.”
영화 `포화속으로`의 소재가 된 형산강전투의 고 이우근 학도병이 어머니께 보낸 마지막 편지의 일부이다.
포항은 낙동강 최후 방어선으로 한국전쟁 당시 유일하게 학도병이 목숨을 걸고 단독 전투를 벌인 전쟁사에 길이 남을 격전지다. 1950년 8월 11일 새벽, 비정규군인 학도의용군 71명이 포항여중(현 포항여고)에서 단독으로 북한군에 맞서 싸워 적군의 포항 진격을 지연시켰다. 하지만 전투에 참가한 김춘식 등 48명이 전사해 전국에서 가장 많은 학도의용군이 희생된 곳이다. 6·25전쟁이 발발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펜 대신 총과 칼을 들고 스스로 전쟁에 참전한, 포항은 호국의 성지이기도 하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최근 포항시의회 상임위원장들과 함께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국가와 지역발전을 위해 애쓰시는 보훈단체를 찾아 뵀다. 군번도 계급도 없이 조국수호의 일념으로 꽃다운 청춘을 불사르시고 이제는 백발이 된 어르신들이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에서 환한 얼굴로 반갑게 손을 잡아주셨다. 전몰군경유족회, 상이군경회, 전몰군경미망인회가 위치한 덕수동 보훈회관과 월남참전자회 사무실에서도 많은 회원들이 우리 일행을 환대해 주셨다. 목숨을 내놓고 참전한 베트남전쟁 당시 살포된 고엽제로 인해 머리카락이 모두 빠지고, 이후로도 반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회원들의 사연은 우리를 숙연케 했다. 전쟁의 포성이 끝나고 긴 세월이 흘러갔지만 아직도 그때의 상흔이 처절한 현실로, 뼈아픈 상처로 남아있는 분들이 적지 않다.
매년 6월이면 선친이 더욱 그립다. 6·25 참전용사이셨다. 생전에 6월이면 해마다 영천의 호국원을 방문해 전장에서 고통의 시간들을 함께 했던 전우들을 떠올리며 만감 어린 모습으로 참배하시던 그 모습이 아직도 며칠전의 일인양 눈에 선하다. 아들로서 `돌아가시면 전우들이 잠든 호국원에 영면`하실 것을 제안했지만 당신께서는 `더 많은 동지가 더 혜택을 누리셨으면 좋겠다`는 신념을 고집하시어 선산에 모시게 된 사연도 있다. 선친께서는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참전 동지들을 한 번도 잊으신 적이 없으셨다.
역사를 되짚어보면 국가가 세워지고 존재하기 위해서는 많은 이들의 희생이 불가피하다. 특히 굴곡이 더 많았던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서 오늘날 누리는 자유와 평화는 순국선열들의 피와 땀의 결과이다. 나라가 위급에 처할 때 조국을 위해 젊음을 기꺼이 받쳤던 그분들의 값진 희생이,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점차 잊혀져 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움이 든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한 국가유공자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드리는 일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어야 한다.
오늘날 미국이 세계 초일류 국가로 설 수 있었던 원동력은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이들은 끝까지 책임진다는 사회적 합의와 강한 보훈정신에 있다. 국가유공자와 그 유가족들이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사회분위기를 조성하고, 마음 속 깊이 간직했던 나라사랑 정신을 행동으로 실천할 때 그분들의 헌신과 희생에 보답하는 길이 될 것이라 생각해 본다. 그 분들이 진정 바라는 것은 단순한 물질적 지원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심과 후손들의 기억하고 기리는 노력들일 것이다.
6월 호국보훈의 달에는 가족과 함께 가까이 있는 추념시설이나 기념관에 들러 나라를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치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송이 국화꽃이라도 올려보자. 국경일에는 집에 태극기를 꼭 휘날리게 하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의 말씀이 다시 한 번 가슴 깊이 각인되는 6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