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복더위 지나고 좋은 계절이 오면 부쩍 잦아지는 우편물이 있다. 바로 청첩장이다. 좋은 계절, 좋은 날짜를 꼽아 몇 달 전 부터 미리 예식장을 잡아 놓으니 좋은 계절의 좋은 날을 주로 결혼예식장을 전전하며 보내게 되는 웃픈(웃기면서도 슬픈, 신조어를 싫어하는 체질이나 무척 적절한 듯) 현상이 벌어진다.
이태 전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망중에도 많은 분들이 찾아 위로해 주셔서 큰 빚을 졌고, 그 은혜를 두고두고 갚으리라 다짐했다. 그것은 상주로서의 진심이었으나 이후로 찾아드는 분주한 경조사 알림은 소시민의 바쁘고 빠듯한 일상에서 축하와 위로의 일들이 시간도, 기운도, 돈도 버거운 게 사실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탓에 부모님을 대신해 남들보다 일찍 젊은 날부터 문중의 경조사에 참여하게 됐고, 30여년 세월을 고향에서 학교선생으로, 지역의 예술문화 활동에 참여하며 살아온 세월 동안 거쳐 간 인연 또한 만만치 않고, 한 발짝만 나서도 고향 인척인 곳에서 내가 모르는 척 할 곳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내 생엔 내게 그렇게 온 인연에 대해 다소 부담이 되더라도 할 수 있는 만큼은 하려는 생각으로 주말과 휴일이면 최소한의 예의복장을 갖추고 복잡한 예식장으로 향하곤 한다. 예식장 로비에서 혼주의 이름을 찾아 그의 딸인지 아들인지 볼 새도 없이 접수처에 들러 봉투를 내밀고는 얼굴 도장이라도 찍으려 혼주에게 인사를 건낸 후 다음 예식장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의 심부름까지 해야 하는데, 시간에 쫓기고 지치다보면 남의 경사에 내가 왜 귀한 휴일 시간을 이렇게 보내야 하는지 은근히 짜증스러울 때도 있다.
초상이야 계획되지 않은 갑자기 당하는 일이고, 상주 또한 슬픔과 황망함 가운데 장례를 치르는 큰일을 해야 하니 주위의 위로와 도움이 필요하나 자녀 결혼에 대해서는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나도 성년이 된 여식이 둘이나 아직 미혼이니 부모님 장례 지나면 큰일은 그만일까 했는데 자식들 혼사가 남았으니 과연 끝이 없는 것이 인생사이기는 하다.
요즘 어떤 이는 부모님 장례까지만 알리고 자녀 결혼은 가족들의 행사로 정한 이도 있고, 길흉사간에 부조금을 받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또한 폐해는 인정하면서도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게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풍습과 명분을 중시하는 세상의 눈치에 혹여 시원찮은 집안으로 여겨질까 하는 염려와 남들이 다 받는데 받지 않는 것도 겸손하지 않은 것처럼 비쳐질까 걱정되기도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가장 큰 속내는 평생 해온 부조 돈에 대한 본전 생각이 아닐까? 그리고 그 순환의 고리는 악순환(?) 되고 있으니 어느 세대에선가 결단이 필요하다. 집집마다 가풍이 있고 개인마다 사정이 있겠지만 이제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연구해 공감대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부조 문화는 조선시대 향약에서 비롯된 것으로 양반들의 향촌 자치와 이를 통해 하층민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교적 예절과 풍속을 향촌사회에 보급해 도덕적 질서를 확립하고 미풍양속을 진작시키며 각종 재난을 당했을 때 상부상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각 직장이나 집단마다 상조회, 친목회 등을 조직하여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데, 현실에서는 이런 저런 이유로 따로 또 해야 하는 이중부담과 심지어 부조 돈의 액수가 친밀한 정도의 기준으로 이어지는 씁쓸한 현실을 우리는 모르는 척 하지만 다 알고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세상도 많이 변하였다. 집성촌의 농경문화는 이미 오래 전의 일이 됐고, 사회가 분화되고 진화함에 따라 미풍양속도 변해야 한다. 슬플 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기쁠 때 진정 위로가 되고 함께 즐거워 할 수 있는 것! 세월의 두께만큼 복잡해진 세상에 허례허식을 줄여 본질의 빛깔을 잃지 말아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의식이 깨어 있는 자들부터 스스로 실천해 새로운 미풍양속의 문화를 선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