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입성 때 사람들은 큰 소리로 재잘거렸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불편한 소리에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루카 19,40)라고 하셨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가 조용히, “멀찍이 서서 그 모든 일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루카 25,49). “너 어디 있느냐?”(창세 3, 9. Where are you?)라며 아담을 찾아 나서던 하느님의 재잘거림은 “돌 속에” 묻혀버렸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재잘거림들이 있다. 그리고 각자 원하는 대로 모여 힘을 이루어 마치 소리가 큰 것이 옳은 것처럼 요구하고 있다. 그 속에서 아무 소리 없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그리스도인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교회조차도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재잘거리는 것이 힘든데 그리스도 신자들은 오죽하랴? 신자들이 삶 속에서 아무런 말 없이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은 힘듦을 지나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있다. 마치 스승에 대한 죄책감으로 도망가지도 못하고 눈치 보며 “멀찍이 떨어져서 불을 쬐던” 베드로처럼,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재잘거리지도 반대로 멀리 도망가지도 못하는 형편이다. 지금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재잘거리신다면 우리는 큰 소리들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3,10)라고 할지도 모른다.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던 모세의 누나 미리암과 “멀찍이 떨어져서” 외치던 나병환자 열명과 죄 많은 세리의 기도는 우리에게 어떤 길을 보여준다. 아무 것도 아닌 나병환자와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외치던 세리는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재잘거려 치유받고 용서받았다. 가슴 졸이던 미리암은 기회가 닿자 달려가 준비된 재잘거림으로서 공주를 설득하여 모세를 살렸다. 하느님께 재잘거려 치유 받고 용서받은 기쁨은 내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느님에 대해 재잘거리고 싶도록 만든다. 그리고 언제든지 그 기회를 보고 준비하게 만든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간절한 재잘거림과 기회가 닿는 대로 사람들에게 재잘거리고 행동할 수 있는 준비이다.
이 두 가지를 통해 주님께서는 침묵의 돌 속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고 우리의 일들을 의미 있게 해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