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터넷이나 티브이에서 “~한다고 전해라”라는 댓글이나 자막을 자주 본다. 25년간 무명이었다가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된 가수 이애란의 노래 `백세 인생` 패러디들이다. 이씨가 안면근육을 모두 사용하여 유사 하회탈 얼굴로 열창하는 장면에 “못 간다고 전해라”라는 노랫말이 적힌 캡처 이미지가 SNS에서 선풍적 인기를 끈 게 이 패러디 현상의 시작이다. `전해라`의 유행에 힘입어 이씨는 각종 티브이 프로그램과 뉴스에까지 출연했다.
“육십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칠십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할 일이 아직 남아 못 간다고 전해라” “백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 날 좋은 시에 간다고 전해라”로 이어지는 이 노래는 무병장수의 기원을 담고 있어 환갑이나 고희, 팔순잔치 등 행사곡과 노년층 애창곡을 목표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20년 묵은 이 노래가 어느 날 갑자기 젊은 층의 폭발적 반응을 얻으며 전 세대를 아우르는 유행가가 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한마디로 요약하면, 한낱 인간이 염라대왕과 저승사자에게 배짱 부리며 개기는 내용이다. 이 `배짱`과 `개김`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리만족의 통쾌함을 느끼는 것 같다. 절대적 권력, 슈퍼 갑에게 당당하게 자기 할 말 다 하는 로망이 “부장이 야근하라 하거든 금요일이라 칼퇴근한다고 전해라” “남편이 밤늦게 밥 차리라 하거든 라면 끓여 먹으라고 전해라” “교수님이 과제 제출하라 하거든 노느라 못 한다고 전해라” 같은 패러디를 양산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한다고 전해라”의 어법은 할 말 다 하는 배짱과는 거리가 멀다. 위의 패러디들도 익명의 온라인 공간에서만 소비될 뿐이다.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대상을 향해 큰소리 뻥뻥 치는 상상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직접 말할 용기가 없거나 명분이 서지 않을 때, 또 말의 수신자와 물리적·심리적 거리가 멀 때 우리는 주로 전언을 사용한다. 중학교 시절 옆 학교 주먹 좀 세다는 녀석과 한 학기 내내 “나 피해 다니라고 전해라” “까불다 죽는다고 전해라” “금요일 방과 후에 봉천동 공사장으로 오라고 전해라” “거긴 네 앞마당이니 신림동 지하주차장으로 오라고 전해라” 따위 졸렬한 전언들로 신경전을 벌이다 정작 대면했을 때 싱겁게 악수하고 끝냈던 기억을 떠올리면, `전해라`는 확실히 대범함보다는 소심함 쪽에 가깝다.
개인과 개인의 간극이 넓은 사회가 전언의 일상화를 부추긴 것은 아닐까. 직접 말할 만큼 살가운 밀착이 불가능해져서 매개를 통하지 않고서는 마음을 전달할 수 없는 소통 장애는 아예 시대병이 된 듯하다. 언론을 통해 전언만 앞세우는 정치인들은 국민과 불통한다. 말 바꾸기가 횡행하고, 자기 말에 책임지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든 세태가 `전해라`를 남발하게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전언에는 발뺌과 물타기의 공간이 늘 존재해서, 최초 발화자나 그 말을 전한 사람이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다”든가 “그저 말을 전했을 뿐”이라고 항변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
백세도 못 사는 인생인데, 할 말 있으면 시원하게 하고 살자 전해라! 그러나 당분간 `전해라` 유행은 사그라지지 않을 전망이다. 이렇게 된 바에 전언의 형식으로 직접 말하자. 손발이 오그라들더라도 “엄마, 사랑한다고 전해라” “여보, 고맙다고 전해라” “아들딸아 자랑스럽다고 전해라”라고, 이럴 때 유행어 핑계로 한번 해보는 거다.
어떤 일을 해낼 용기와 명분과 능력이 다 없거나 셋 중 하나라도 모자랄 때 전언은, 일부러 여러 사람 들으라는 선언의 성격을 나타내며 주목과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나는 용기와 명분과 능력이 다 있음에도 새해를 향해 이렇게 외치는 중이다. “올해는 장가가고 싶다고 전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