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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놈은 내가 할래!

등록일 2016-07-25 02:01 게재일 2016-07-25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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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욱<br /><br />시인
▲ 김현욱 시인

올해는 예기치 않게 과학 교과 전담을 맡았습니다. 15년 동안 담임을 맡아 반 아이들과 시 암송이며 시 쓰는 재미로 살았는데, 올해는 아이들 시 읽는 기쁨이 사라져 내내 서운했습니다. 쾌쾌한 약품 냄새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인체모형이 떡하니 서 있는 과학실은 아직도 적응이 안 됩니다. 그나마 위안인 것은 수십 개의 수납장과 도감(圖鑑)들이 있어서입니다.

과학실은 수납장이 많습니다. 보관할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수납장 열어 보는 재미가 이리 쏠쏠한 지는 과학실에 와서 처음 알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도감을 발견한 것은 큰 행운입니다. 동물도감, 식물도감, 곤충도감…. 쉬는 시간 틈틈이 곤충도감을 읽었습니다. 읽다가 벼락을 맞은 듯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곤충도감이야말로 동시의 보물창고구나!`

시골가시허리노린재는 꽁무니를 대고 짝짓기를 합니다. 물자라 수컷은 등에 알을 지고 다닙니다. 멧노랑나비나 각시멧노랑나비는 더위를 피하려고 여름잠을 잡니다. 여름잠이라니! 하루살이는 실제로는 이삼일부터 열흘까지 삽니다. 한 달이나 두세 달쯤 사는 하루살이도 있지 않을까요? 왕잠자리 애벌레는 아가미가 똥구멍 안에 있습니다. 똥구멍으로 물을 빨아들이고 내뿜으며 숨을 쉰다고 합니다. 똥구멍에서 물을 내뿜는 힘으로 앞으로 나아간다니 참 신기합니다. 똥구멍 얘기만 꺼내도 까르르 웃는 아이들에게 똥구멍이 얼마나 대단한지 가르쳐 줘야겠습니다.

학교 운동장이나 마당, 공원에서 우리가 흔히 보는 개미는 일본왕개미와 곰개미입니다. 곰개미는 일본왕개미보다 크기가 조금 작습니다. 곰개미는 살아 있는 먹이를 잡을 때는 배 끝에서 개미산을 쏩니다. 개미가 물어뜯는 것 외에 무엇을 쏜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개미` 하면 독자들은 무엇을 떠올릴까요?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부터 국내에 200만 권 넘게 팔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 `앤트맨`도 순위에 들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어이없는 놈`(문학동네, 2013), `커다란 빵 생각`을 낸 김개미 시인을 떠올리는 독자도 있을 것입니다. 유쾌, 상쾌, 통쾌한 동시를 기다려온 독자라면 말입니다.

점잖은 정치가는 준혁이, 네가 해/ 나는 구름처럼 다가가 주머니를 터는/ 외로운 소매치기 할래// 숲 속의 잠자는 공주는 다흰이, 네가 해/ 나는 외다리 목발 탁자 위에 올려놓고/ 술 마시고 노래하는 카리브 해 해적 할래// 깐깐한 보안관은 예담이, 네가 해/ 나는 아무 데나 총 쏘고 도망치는/ 흉악한 현상 수배범 할래// 은행 강도 놀이를 하든/ 못된 마법사 놀이를 하든/ 나쁜 놈은 나야, 내가 할래// -`역할 놀이`

김개미 시인의 동시집 `커다란 빵 생각`에서 한 편만 골라달라면 나는 이 시를 선택할 것입니다. 실제로 동시집을 읽고 가장 먼저 아이들과 동료 선생님들에게 소개한 시가 `역할 놀이`입니다.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강낭콩 수업을 앞두고 아이들에게 `역할 놀이`를 읽어 줬습니다. 아이들 표정이 물음표에서 느낌표로 옮겨 갔습니다. 입꼬리가 씩 올라가더니, “한 번 더 읽어주세요”라는 앙코르 요청(?)까지 받았습니다. 그건 좀처럼 흔한 일이 아닙니다. 김개미 시인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기쁠까요?

그런데 몇몇 동료 선생님은 우려를 표했습니다. `나는 아무 데나 총 쏘고 도망치는 흉악한 현상 수배범 할래` 이건 너무 과하다는 식이었습니다. 외로운 소매치기, 카리브 해 해적, 흉악한 현상 수배범, 은행 강도, 못된 마법사가 되기를 간절하게 꿈꾸는 아이들이 과연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요?

하긴, 모를 일입니다. 장래에 소매치기, 해적, 강도, 소년병이 될 수밖에 없는 아이들과 `역할 놀이`라는 시를 듣고 깔깔깔 웃으며 잠시라도 즐거워하는 아이들이 동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슬픈 세상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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