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구미에 근무하는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한때 언론사에서 함께 동료로 지냈던 이 지인은 전화를 받자마자 “나라가 어찌 되려고 이러나”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인 구미지역에서 근무하는 그가 느끼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심각성은 남다르다 할 수 밖에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사과하는 사태에까지 이르자 “대구·경북 사람들이 느끼는 배신감이 더욱 큰 것 같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TK지역에서 더욱 큰 민심이반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박 대통령을 지지한, 가장 큰 이유가 “(박 대통령은) 사심이 없을 것”이란 믿음으로 지지했는데, 알고보니 박 대통령 배후에 온갖 사심에 가득 찬 최순실이란 사람이 도사리고 있는 줄 누가 알았겠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 박 대통령이 무슨 낯으로 이 나라의 국정을 이끌어 나갈 수 있겠느냐고 걱정했다. 그래서 나온 얘기가 박 대통령은 남은 임기동안 대외적으로 나라를 대표하는 일만 맡고, 내치는 거국내각을 구성해 맡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누구보다 충격을 받은 것은 그동안 대통령을 보좌해온 청와대 참모들일 듯하다. 이들 참모들은 대통령의 사과 기자회견 이후 허탈상태에 빠진 분위기다. 비선실세인 최순실은 대선 전후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선거와 국정에 개입해왔지만 박 대통령의 참모 대부분은 최씨를 전혀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최씨 의혹이 몇 달 전부터 청와대 주변에서 계속 제기됐지만 참모진이 적절한 대책을 내놓지 못했던 것 역시 참모진 대부분이 최씨 자체를 몰랐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최씨 얘기를 알고 있는 것은 박 대통령 본인과 문고리 3인방(이재만·안봉근·정호성 비서관) 정도만 알고 지낸 것 아니겠냐는 추측이 파다하다. 이 때문에 가장 곤혹을 치른 사람은 바로 이원종 청와대 비서실장. 이 실장은 지난 21일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최순실씨의 대통령 연설문 개입의혹에 대해 질문을 받고,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얘기”라며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믿겠느냐”고 일축했다가 낭패를 당했다. 불과 나흘 뒤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사과로 비선의 존재가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비서실장은 여야의원들이 “최순실씨가 연설문 봤다는 사실 알고 있었느냐”고 묻자 “내가 알았다면 어떻게 그런 얘기를 했겠느냐”고 반문했지만 비서실을 총괄해야 할 비서실장이 겉돌았다는 얘기니 그로서도 이래저래 곤혹스럽고 불명예스런 일이 되고 말았다. 지역발전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다 몇 달 전 발탁된 이원종 비서실장이야 청와대에 입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렇다쳐도 1년 이상 박 대통령을 모신 전임 비서실장들도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게 더욱 놀랍고 충격적이다. 실제로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연설문 수정 사실을 몰랐고, 이병기 전 비서실장은 아예 최순실씨를 만난 적도 없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다고 한다.
`최순실 게이트` 수습책의 일환으로 `거국중립내각론`이 정치권에서 부상하고 있다. 거국중립내각이란 특정 정당이나 정파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 여야가 각각 추천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내각을 꾸리는 것을 말한다. 거국내각이 해법으로 제시되는 이유는 최순실 파문으로 박 대통령이 권위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만큼 1년 이상 남은 임기 동안 국정 공백을 최소화 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여소야대 국회상황에서 야당과의 실질적인 협치만이 국정을 굴러갈 수 있게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설득력을 더한다.
벌써 대학생들은 거리에 나가 시국선언과 함께 대통령 퇴진을 외치고 있다. 교수들도 시국선언으로 지식인의 양심을 실천하고 있다. 여당과 정부는 하루빨리 초고강도 수습책을 내놔야 한다. JTBC 방송 손석희 앵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를 빗대 명명한, 낯부끄러운 `순실의 시대`가 하루빨리 지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