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다”고 했다. “민주주의가 아니다”라고도 했다. 몇 달째 국민들을 분노와 절망으로 공황상태에 이르게 만들어 체감온도가 영하 10도를 밑도는 한겨울 맹추위 속에서 촛불을 들게 만든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이 정도면 적반하장(賊反荷杖)을 넘어선다.
설 연휴를 앞둔 지난 주 수요일. `국정농단 주범`으로 지목된 최순실 씨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 특별검사 사무실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언론사 카메라를 향해 외쳤다. “딸까지 멸망시키려 하니 너무 억울하다”고, “민주주의에 입각한 조사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마치 독재시대의 양심수처럼 행동하는 최 씨를 보며 `억울하다`와 `민주주의`란 단어가 가진 뜻을 사전에서 다시 찾아보고 싶어졌다. 사실 정말로 억울한 사람은 “억울하다”란 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한 버스 운전기사가 2천400원을 회사에 미납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법원은 그 해고가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단순한 실수로 추측되는 요금 미납을 이유로 식구들의 생계 수단을 빼앗긴 그 기사의 심정은 어떨까?
기자가 아는 형제가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은 그들은 병약한 모친과 농사를 지어 겨우겨우 삶을 이어갔다. 군대에 갈 나이가 되자 “저희가 없으면 엄마 혼자 힘든 농사일을 할 수 없다”고 병무청에 사정을 이야기했으나, 호소는 묵살됐다. 형제는 둘 다 최전방 소총수로 국방의 의무를 다했다. 부모가 가진 든든한 배경과 돈으로 군복무를 면제받는 청년들이 흔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가 없는 형제에겐 배경도 돈도 없었다. 벌써 20년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당시 이야기가 나오면 그들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닫는다.
버스기사와 형제의 안타까운 사례는 측은지심을 부른다. 하지만, 사회엔 지켜야 할 원칙이 있으니 이들은 “억울하다”고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대체 최순실 씨는 뭐가 억울하다는 걸까. 선출되지도 임명되지도 않은 `해괴한 권력자`로 청와대 행정관과 고위공직자를 마음대로 주무르며 국가 정책을 좌지우지하고, 강요와 협박으로 기업들로부터 수백억 원의 돈을 받아 챙겨온 지난날처럼 하지 못하는 게 억울하다는 건가?
그게 아니면 아버지 때부터 지저분한 방법으로 축적한 돈과 일그러진 권력을 이용해 이화여대에 부정입학시킨 딸 정유라가 학교에서 쫓겨나게 된 게 억울한가? 이쯤 되니 최 씨가 `억울함`이라는 단어의 뜻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조사받고 있지 못하다”는 최순실 씨의 주장 또한 박영수 특검팀만이 아닌 국민 전체를 모욕하는 언사다. `민주주의`란 주권을 가진 국민을 위해 정치를 행하는 제도를 의미하며, 전제군주제와 독재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는 단어다. 민주주의사회에서는 구성원들이 합의한 `법`에 의해서만 처벌이 가능하다. 전제군주제사회나 독재 체제 아래서는 그렇지 않다.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미셀 푸코(Michel Foucault·1926~1984)의 책 `감시와 처벌`에는 죄수의 몸에 끓는 납을 붓고 사지를 절단하는 끔찍한 광경이 묘사된다. 당시의 처벌은 법에 의한 게 아닌 권력자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민주주의의 발전 역사란 감정적인 전횡이 아닌 법에 의한 통치를 확립시키고자 했던 과정에 다름 아니다. 바로 이 `법으로 통치되는 민주주의사회`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다.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도 이와 다르지 않다.
최순실 씨가 전제군주시대를 살았다면 어땠을까? 현재 드러난 범죄혐의만으로도 재판 과정이 생략된 채 단죄됐을 것이다. 법으로 통치되는 민주주의사회에서 `민주적 방식`으로 조사받고 있기에 고위직 전관 변호사의 조력을 받으며, 출석거부권과 진술거부권까지 행사하고 있다는 걸 최 씨는 모르고 있다. 그걸 안다면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든 자가 부끄러운 입을 스스로 열어 `민주주의`를 욕보일 수는 없는 일이다.